필사를 시작했다
인터넷 서점의 장바구니에 한참을 두었던 책과 더불어 생각지도 않은 책까지 다섯 권을 주문했다. 이달의 사은품으로 준다는 독서대가 탐나기도 했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을 때의 기쁨은 말해 뭣하랴! 택배로 도착한 포장을 열며 얼른 책을 마주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슴이 쿵쾅쿵쾅 방망이질을 했다.
휴일의 나른한 오후, 식곤증까지 몰려와 꾸벅꾸벅 졸거나 아예 침대로 들어가 낮잠을 청했을지도 모를 그 시간에, 그리고 최근엔 뭘할지 모르겠는 이상한 서성임이 낯설어 궁금하던 차에, 그것이 독서를 놓쳐버린 요즘의 일상임을 알아낸 후에, 택배상자 안의 내가 선택한 책 다섯 권. 정확히는 네 권이다. 한 권은 5년째 꾸준히 쓰고 있는 '5년 다이어리'인데, 올해 안에만 구입하면 될 것이었으나 독서대를 받기 위해 미리 당겨 구입했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구독중인 밀리의 서재에 그 책이 있는지 확인하거나 내가 살고 있는 의정부시 전체 도서관에서 검색한다(상호대차가 가능하니까). 밀리의 서재에 원하는 책이 있으면 정말 기쁜 마음으로 '내 서재'에 담아두고 읽는다. 그런데 난 아직도 e-book은 낯설다. 어차피 구독료를 내는 곳에 책이 있으면 횡재를 한 듯 기분은 좋지만 책 읽는 맛은 나지 않는다. 밀리의 서재에 없는 책이 도서관에 있으면 이것 또한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근처 도서관은 직접 가지러 가고, 먼 곳의 도서관은 상호대차로 대여를 한다. 그런데 밀리의 서재나 도서관의 책이 늘 아쉬운 건, 밑줄을 긋고, 내 생각을 끄적일 수 없다는 것! 모든 것을 만족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고 만다. 물론 나의 책 읽는 방식을 생각하면 구매하는 것이 맞지만 비용문제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책 사는 돈을 아까워하지 말라고. 난 그럴 수 없다. 책 사는 돈이 아깝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 책이나 다 사들이고 싶지도 않다. 심사숙고해 정말 사고 싶은 책이 있을 때, 그때 반갑고, 고마운 마음으로 구입한다. 고마운 마음이라고 쓰는 이유는 그런 책을 써준 작가에게 드리는 나의 찬사다.
이번에는 필사책 두 권을 샀다. 사실 필사 할 노트를 구입했기에 필사를 위한 책을 구입할 생각은 없었는데, 무엇에 홀린 듯 구입했다. 아마도 내 안에서 손으로 무언가를 쓰고 싶은 욕망이 컸었나보다.
김종원 작가는 유튜브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분의 해박한 지식과 수려한 언변에 놀랐었다. 그분이 구사하는 언어를 내것으로 가져오고 싶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꾸준히 사색하여 쓴 문장들 중에 가장 농밀한 것들만 모아 담았다'는 프롤로그의 글을 보며 그것들만 내 것으로 가져와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적 수준이 낮을 땐
주변에 온통 비난할 것들만 보인다.
좋은 것을 보고 싶어 노력을 한다고 해도,
시야를 넓히는 것은 의지로 해결할 수 없다.
주변에서 누군가 자꾸 부정적인 말만 하면서
분위기를 흐린다면 크게 신경 쓰지 마라
그는 자신이 그런 상태라는 것을 모른다.
지적인 수준이 높아져야
그에 맞는 좋은 것들이 보인다.
그렇기에 필사가 필요하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게 많았다는 것을
하나하나 실감하며
경탄의 나날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말한다. '당신은 이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건 필사하는 자에게 찾아올 아름다운 숙명이다. 소중한 자신을 위해 더 나은 모습이 되어보자.'
나의 지적 수준이 낮음을 인정한다. 누군가 자꾸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내 지적 수준이 고것밖에 안되니 미운 것들만 눈에 보인다. 시간이 좀 지나서야 아주 조금 받아들여진다. 그것도 내가 많이 아픈 후에. 이걸 아는 나로서는 나의 지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저자의 좋은 말을 마음에 담고 싶었다.
「어른의 어휘력」으로 잘 알려진 유선경 작가의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는 이미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었다. 그냥 그렇게 읽는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필사할 부분들은 건너뛰고 어휘력을 어떻게 향상할지에 대한 부분만 읽었는데, 두고두고 그 안의 발췌글들이 마음에 남았다. 그러나 발췌한 부분만 읽는 것은 의미 없이 느껴지는 내 성향이 이 책을 서점의 장바구니에 오래 머물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김종원 작가의 책을 구입하며 홀린 듯이 같이 구입해 버렸다.
많은 이들이 어떻게 하면 세상이 변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어떻게 해야 세상을 대하는 당신이 변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세상은 그 후에야 변하겠지요. 이러한 변화를 이끄는 시작은 '앎'에 달려 있습니다. '많이'가 아닌 '올바로'에 말입니다.
어휘력이나 문해력의 목적은 단순히 잘 읽고 잘 말하며 잘 쓰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살기 위해서'입니다. 읽고 말하며 쓰는 것은 우리가 살기 위한 방법입니다. 구체적으로 인생의 다양한 과제와 문제를 예측하고 대비하며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그렇게 했음에도 피할 수 없는 위기나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맞아 쓰러지더라도 무기력이나 절망, 증오에 빠지는 대신 수월히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무릎을 '탁' 쳤다. 살기 위해서 읽고 말하고 쓴다니... 눈과 귀와 입이 있으니, 의사소통을 위해 단순히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아니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런다니... reading과 writing은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speaking이 그러하다는 것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내가 얼마나 말하고 싶어하는지 깨닫는 순간, 그저 수다스러움, 나를 알리고 싶은 인정욕구라고 치부했던 그것이 살기 위함이었음을 동시에 깨우치게 되었다. 그렇구나. 읽고 쓰고 말하는 이 모든 것이 잘 살기 위해서구나.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고, 전문가들의 몫으로 넘기면 된다. 그리고 그 예측도 어긋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변하고 싶다. 그 첫 번째 선택이 이 두권의 책이다.
여기에 전에 사두었던 김용택 시인의 시(詩) 필사 책도 있으니, 이 세권의 책을 다 필사하려면 1년 정도 걸리지 싶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김종원 작가의 책도 더 대출해서 읽을 생각이고, 독서 관련한 책 몇 권도 또 읽고 싶어졌다. 영어학원도 일주일에 이틀이나 다녀야 하고, AI(chat gpt) 관련한 수업도 들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있을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젠 공연관람과 사람 만나기를 좀 줄이고 독서하는 시간을 늘려야지.
2024년 10월 14일, 나만의 영문학과 입학! 벌써 1년이 다가온다. 앞으로 3년 4개월 남았다. 이 시간동안 영어 전공이니 영어공부와 더불어 운동, 명상, 사색, 독서, 필사, AI공부, 클래식 음악까지 정말 열심히 해보자. 또 내가 원하는 미니멀한 삶까지 조금씩 연습해보자. 졸업하게 되는 2028년 10월 14일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 있을까? 늘 설레는 매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