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촉하게 비가 내리는 오후. 참 좋다.
비 내리는 소리, 비에 젖은 도로를 달리는 촉촉한 차바퀴 소리.
이런 날은 넓은 창가에 앉아 비가 내리는 것을 마냥 바라만 봐도 행복감으로 가슴이 촉촉해질 것이다.
구수하고, 향기로운 커피 한잔과 함께라면 이 세상을 다 가진듯할 텐데......
언제쯤 커피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게 될까?
지금은 항암 중이라 남편이 즐겨 마시는 냉커피를 한 두 모금 마시는 걸로 만족한다.
커피는커녕 뭐든 먹기만 하면 배가 살살 아프고, 설사대마왕 찾아오고, 그러고 나면 기진맥진해진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그동안 한 숟가락 정도밖에 먹지 못하던 밥을 조금씩 늘려가는 요즘, 조금 더 욕심내서 밥을 데워 어제 엄마가 해오신 맛난 반찬으로 식사를 했는데, 역시나 찾아오신 설사대마왕.
화장실을 다녀와도 배가 계속 아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젯밤, 잠도 설친 데다가 배도 계속 아파서 잠을 청했다.
그렇게 두 시간을 정신없이 자고 일어나니 아픈 배도 가라앉았다.
그러나 간단하게 채소류로 늦은 점심을 먹은 지금도 배가 아프다.
언제쯤 배 아픈 것도 가라앉고, 설사대마왕도 사라질까?
건강이 최고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건강하지 않은 몸을 챙기며 사는 것보다, 건강한 몸을 조금만 챙기며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아프니까 깨닫게 되니.....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술을 자주 마시는 동생에게 이런 뒤늦은 깨달음을 얘기해도 먼 나라 얘기쯤으로 듣는다.
'설마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설마 나한테......
그 설마가 나한테 찾아왔다. 그리고 하염없이 떨어진 삶의 질. 계단 몇 개도 오르기 힘든 저질 체력.
먹고 싶은 거 못 먹고, 먹으면 쏟아내야 하는 이 슬픈 상황이 자신에게 올 거라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며 산다.
언제나 예기치 못한 상황에 불쑥, 정말 터무니없이 불쑥 찾아오는 것이기에.
늘 나를 옆에서 보는 남편도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아픈 나 때문에 술을 덜 마실뿐, 내가 없으면 아니 내가 조금만 나으면, 아니 아니 항암만 끝나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것이다.
아마 나도 이렇게 환자가 되지 않았다면 여전히 퇴근길에 캔맥주를 사들고 들어오거나 외식을 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을 것임을 잘 안다.
암이라는 놈이 찾아올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늘 아픈 배를 어루만지며, 설사대마왕을 맞이하며, 지친 체력으로 버텨야 하는 이 일상이 버겁다.
아무렇지 않은 듯 예전처럼 영화를 보고, 공연을 보려고 예매를 해 놓았지만
편안하게 공연을 보기 위해, 편안하게 사람을 만나기 위해 나는 힘든 사전 작업을 해야만 한다.
미리 식사를 하고, 화장실을 몇 번 다녀온 후 모든 것이 진정될 때까지 긴장하며 추슬러야 한다.
아직 완쾌되지 않은 몸으로 공연을 예매하고, 지인들과 만날 약속을 하고, 독서토론회도 참가하려 한다.
아무렇지 않은 듯, 속으로는 힘겨워하며......
이것이 나의 자존심인지, 그동안 살아온 내 삶의 방식을 놓칠 수 없음인지, 앞으로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인지조차 나는 알지 못한다.
그냥 하고 싶다. 그냥 공연을 보고 싶고, 토론회도 참석하고 싶다.
몸이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그냥 하고 싶다.
그렇다면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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