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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편12

구부러진 길 구부러진 길 나는 구부러진 길이 좋다구부러진 길을 가면나비의 밥그릇 같은 민들레를 만날 수 있고감자를 심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날이 저물면 울타리 너머로 밥 먹으라고 부르는어머니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구부러진 하천에 물고기가 많이 모여 살 듯이들꽃도 많이 피고 별도 많이 뜨는 구부러진 길구부러진 길은 산을 품고 마을을 품고구불구불 간다 그 구부러진 길처럼 살아온 사람이 나는 또한 좋다반듯한 길 쉽게 살아온 사람보다흙투성이 감자처럼 울퉁불퉁 살아온 사람의구불구불 구부러진 삶이 좋다구부러진 주름살에 가족을 품고 이웃을 품고 가는구부러진 길 같은 사람이 좋다 - 이 준관 -    고속도로의 쫙 뻗은 시원함이 좋기도 하지만시골의 구불구불한 길은 참 정겹다.우연히 등 굽은 어르신의 느린 무단횡단조차도 참을성 .. 2024. 9. 25.
부르심 - 정 호승 - 누가 나를 부른다아침부터 밥도 먹기 전에돌아가신 어머니가 나를 부르나 싶어뒤돌아봐도 아무도 없다 또 누가 나를 부른다뒷골목에 저녁 어스름이 지는데돌아가신 아버지가 나를 부르나 싶어얼른 뒤돌아봐도 아무도 없다 저녁을 먹고 거실에 앉아TV뉴스를 보다가 잠깐 졸았다검은 창밖에서 누가 또 나를 불렀다창문을 열었다아무도 없다 새벽에는 비가 왔다빗속에서 누가 또 나를 불렀다빗소리인가 싶어 얼른 창문을 열었다새소리가 들렸다 나는 누가 나를 자꾸 부르는지그제야 알아차리고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부르시면 가야 한다당신이 부르시는 소리는 새소리를 닮았다     누가 부른다고 시인은 자꾸 말할까?그러고는 아무도 없단다.돌아가신 어머니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니고, 빗소리도 아니라더니새소리를 닮은 그분의 소리였구나!아.. 2024. 8. 10.
족쇄 - 정 호승- 풀어주세요이제 복종의 날은 끝날 때가 되었어요해가 지면 무덤에서 내 힘으로 풀 수 있지만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오늘도 당신이 풀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풀어주세요당신의 족쇄를 찬 내 발목은 이미 허물어졌어요그동안 복종은 사랑을 주었지만사랑은 맹종을 가르쳐이제 며칠만 더 있으면 무릎까지 허물어져더이상 족쇄를 채울 수 없어요 풀어주세요 부디사랑에는 반드시 자유가 필요해요어느 날 내가 청년이었을 때당신이 내게 족쇄를 채웠으므로당신이 풀어주지 않으면 아무도 풀 수가 없어요     시인은 하느님을 많이 사랑하는가 보다. 당신이 채워주신 그 족쇄가 무거운가?그 무게를 느끼고 싶다.나는 그 족쇄가 무겁고 나를 옭아맬 거 같아 뒤로 빠져있다.내 곁에 당신이 있음을 깊은 곳으로부터 느끼고 있는데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어느.. 2024. 7. 31.
시 - 나 태주 - 마당을 쓸었습니다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아름다워졌습니다      먼지 같은 작은 존재가 한 아주 작은 일아무도 모르는 혼자만 아는 그것지구의 한 모퉁이에서오물조물 꼼지락꼼지락살아내고 있는 생명체자신이 온 우주인 듯 착각하며온몸으로 잘난 체하며 뽐내고 있는 인간  먼지 같은 작은 존재가마당을 쓸고시 하나 떠올리고사랑하는 마음 가진 것이결코 작지 않음을...지구 한 모퉁이 작은 존재가아름다움으로 빛을 발할 때온 우주가 아름다움으로 답 한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았네... 2024. 7. 17.
나는 납치되었다 - 정 호승 -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나는 납치되었다검은 승용차에서 내린 몇몇 사내들이걸어가는 내 목덜미를 낚아채고자동차 트렁크에 종이처럼 구겨 넣었다 야근을 하고 밤늦게 퇴근할 때도 나는 납치되었다전동차가 승강장 안으로 들어오기도 전에몇몇 사내들이 나를 끌고 수서역 터널 속으로 어둠과 함께 사라졌다 나는 납치되는 나를 늘 바라보고만 있었다내가 납치되는데도 저항할 수가 없었다길을 가다가도 지하철 승강장 입구에서도납치되는 나를 물끄러미 구경만 하고 있었다 나는 왜 내가 매일 납치되는지 알 수 없었다어디로 납치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이튿날 해가 뜨면 오금동 골목 쓰레기 더미나지하철 종착역 화장실에손발이 묶인 채 버려져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하루는 그런 나를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어경찰에 신고하려다가 문득 알아차렸다내가.. 2024. 7. 11.
당신의 그물 - 정 호승 - 당신의 그물이 때로는 오월의 바람으로 따스한 햇살로장미와 모란과 수수꽃다리의 향기로 엮여 있어도나는 지금까지 당신의 그물에 걸리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당신이 아침 일찍 강가에 나와 나를 투망하는 순간나는 해를 따라 힘차게 강물을 거슬러 올랐으며때로는 바위틈과 수초 사이로 죄 많은 인생을 감추고당신의 그물에 걸리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해왔다 비록 당신의 그물이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엮여 있다 할지라도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고 감사하다고 그물을 던져도나는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당신은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고다시 나를 찾아와 그물을 던지는가 봄은 왔지만 아침은 오지 않고 밤은 깊어간다내가 지금 죽는다면 강가의 안개처럼 평화롭게 죽어갈 수 없을 것이다차라리 당신의 그물에 걸린 .. 2024. 7. 9.
콩 씨네 자녀 교육 - 정 채봉 - 광야로내보낸 자식은콩나무가 되었고, 온실로들여보낸 자식은콩나물이 되었고.     광야까지는 아니어도대학생이 된 아들을 중국으로 보냈다.한 학기가 지나면 돌아오겠다며 가기 싫어하던 아들은가능한 세 학기 모두 지난 후 돌아왔다.2년의 중국 유학, 그리고 거의 2년에 가까운 군 생활...그렇게 아들과 우리 부부의 물리적 거리는 멀어졌다. 제대한 후, 취업 하기까지 거의 2년...아들은 이제 완전히 분가를 하겠다고 하였다.그렇게 아들과 우리 부부의 물리적 거리는 완전히 끝맺음을 했다.너 따로, 우리 따로...그리고 그 아들에게 다른 여인이 생겼고,결혼을 했다.이젠 정신적인 거리까지 멀어졌다. 그는 콩나물이 아닌, 콩나무가 되었다.혼자서 이 세상에 홀로 섰고,제 밥벌이 하며, 한 가정을  이끌고,사랑하는 이와 알.. 2024. 7. 8.
함께 간다는 것 - 문 삼석 - 함께 간다는 것은줄 맞춰 나란히 간다는 게 아니야 모두가똑같은 걸음으로 간다는 것도 아니야 어느 때는 늦게어느 때는 빠르게 걸어가더라도 같이 가는 옆 사람의걸음을 살피며 가는 일이야 그 걸음 속에 들어있는 마음들을 읽으면서 가는 일이야    성질 급한 나는 뒤처지는 누군가가 싫었다.마구 끌고가야 했고,따라오지 않으면 참을 수 없었다. 나보다 먼저 가는 이는 또 얼마나 미워했는지...질투하고 외면했다. 이제야 조금 이해한다.모두 나와 같을 수 없음을...각자의 속도대로 가는 것을,그리고 그게 맞다는 것을... 2024. 7. 8.
엄마, 저는요 -이 해인 - 엄마, 저는요새해 첫날 엄마가저의 방에 걸어준고운 꽃달력을 볼 때처럼늘 첫 희망과 첫 설렘이 피어나는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어요 첫눈이 많이 내린 날다투었던 친구와 화해한 뒤손잡고 길을 가던 때처럼늘 용서하고 용서받는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어요 엄마, 저는요장독대를 손질하며 콧노래를 부르시고꽃밭을 가꾸시다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시는엄마의 그 모습처럼늘 부지런하면서도 여유있는그런 마음으로 살고 싶어요    늘 고운 글을 쓰는 이해인 수녀님희망과 설렘, 용서, 부지런함과 여유...이런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그건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전하는 선물이겠다. 고운 삶을 살고자 열망한다.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열망한다.그러기위해 노력하면서... 산다. 2024. 7.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