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저자는 정신분석 전문의이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아픈 사람들의 심리를 참 잘 알고 있다.
책을 읽다가 '아! 나도 이래서 이렇게 행동했구나!' 또는 '아! 그 사람이 그래서 그렇게 말했구나!'하고 깨닫게 된다.
사람의 말이나 행동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에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가 보다.
이 책을 읽다가 무척 공감이 가는 구절이 있었다.
그 이유는 얼마 전 친구와의 통화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 친구인데, 한참 외모에 관심이 많던 중학생 때, 나는 내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친구와 한 반이 되었고, 나보다 더 예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가진 장점이 분명 있었음에도 외모가 우선인 사춘기 아이에게 그 친구는 질투의 대상이었다.
문제는 한번 가진 그 질투는 참으로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어쩌면 지금도 가슴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세월이 흘렀고, 그 친구는 이혼을 했고, 지금 시집가지 않은 외동딸만 두고 있다.(같이 살지는 않는다)
그 친구는 외로워하며 남자 친구를 여러 번 바꾸어가며 만났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우리가 각자 결혼을 하고, 그 친구는 자신의 결혼생활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행복해 보이는 우리 집을 시기하게 된 것 같다.
물론 나는 전혀 몰랐었다가 그녀가 나중에 얘기해서야 알았다.
왜냐하면 난 그녀를 질투하기에 바빴으니까.. ㅎㅎ 이쁘다는 이유로.
하지만 내 나이 40이 넘고, 50이 넘어가니, 그녀의 미모나 나의 미모나 비슷하고(물론 내 기준), 다시 남자를 만나서 시집갈 것도 아니고, 미팅에 나가 남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이쁨이 돋보여야 하는 나이도 아니니, 이젠 그런 시기심은 내게서 사라졌다.
오히려 항상 자기 계발을 하려고 노력하며 공부하고, 독서하는 나의 삶이 나의 온몸에서 발산이 되어 나는 굉장히 자신감 있는 중년의 여성으로 나이 들어가고, 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랑하고 사랑받는 삶을 살다 보니 스스로도 여유가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자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직도 나에 대한 시기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 그녀와 통화를 하며 암환자가 된 후, 남편과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다운되는 느낌을 받았다.
아~ 내가 실수를 한 건가?
핸드폰을 끄며 미안한 마음이 잠시 생겼다.
듣는 사람이 느끼는 박탈감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상대에게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러니 기쁜 마음은 정말로 가깝고 너를 아끼는 사람에게만 표현하도록 노력해라.
그렇구나. 그녀의 박탈감을 내가 건드린 거구나. 그녀는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는데, 나는 내 감정만 생각하며 내 얘기만 했구나. 그녀의 약한 부분을 내가 건드리고 말았구나.
말을 할 때는 그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까지 생각하며 말해야 할 성숙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다 이 구절을 읽었다.
시기심도 버릇이다. 이 버릇을 고치려면 자신의 행복과 즐거움에 집중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궁극적으로 보자면 누구든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이고, 행복하면 타인을 더 이상 부러워하거나 시기할 일도 없을 테니까. 네가 즐겁고 네가 행복해지는 일을 더 많이 해라. 그러면 시기심이 더 이상 너를 괴롭히지 않을 테니까.
아~ 그녀의 시기심도 어쩌면 버릇인지도 모른다. 나의 성숙하지 못한 말 전달의 방법의 문제점도 있지만, 버릇이 되어버린 나에 대한 시기심의 문제도 한몫했을 것이다. 환자가 된 친구가 가족과의 사랑을 더욱 느꼈다고 말하면 공감해줄 수 있는 부분이련만. 그녀의 나에 대한 시기심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의 마음의 문을 그만 닫아버리고 만 것이다.
이것은 비단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릴 적, 내가 그녀에 대해 느꼈던 시기심이 그토록 오래갔던 것도 버릇이었던 거다.
지금도 다 내려놓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보면 말이다.
다행히 작가는 이 버릇을 고치는 방법을 제시해주었고, 언젠가 그녀를 만나면 이 방법을 알려주고 싶다.
왜냐하면 난 이미 이 방법으로 시기심의 버릇을 고쳤기 때문이다.
이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 시선을 오로지 내 삶의 발전에 맞추며 살아오다 보니, 내 행복과 즐거움에 집중하게 되었고, 내가 행복하고 즐겁다 보니 남이 나보다 더 예쁘던지, 더 잘 살던지 시기할 이유가 없었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미국의 어떤 작가가 이런 말을 했었다.
행복해 보이는 가정도 그 지붕을 열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어느 가정이던지 다 문제가 있다고.
멀리서 보면 다 아름다워 보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그렇지 않다고.
맞다. 내 것이 아니면 로망이다. 하지만 막상 내것이 되면 100퍼센트 만족이란 것은 없다.
50년을 살아오면서 나는 내 삶에 집중했고, 어제보다 나아진 오늘에 만족해했고,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친구가 부자가 되고, 해외여행을 제집 드나들듯이 하면 잠시 배가 아프려고 했지만, 뚜껑 열고 보면 다 비슷할 거라 생각하며 내가 가진 것에 만족했고, 착한 내 남편과 아들이 있음에 감사했다.
이렇게 글을 쓰며 돌아보니 참 잘 살아온 것 같다. 성숙한 어른으로 잘 성장해온 거 같다.
다만 위에 쓴 글처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상대에게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는 아직 서투른듯하니 이 부분은 앞으로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자존감은 ‘나는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며, 살면서 부딪치는 문제들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이다. 그러고 보면 자존감이란 마음의 기초체력 같은 것이다.
이 부분도 같은 맥락일 거다.
그녀는 평탄하지 못한 결혼생활로 인해 자존감이란 기초체력이 약해진 것 같다.
반대로 나의 경우는 불우했던 어린 시절로 인해 자존감이 높지 못한 사람이었으나, 참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면서, 또 나의 발전을 위해 독서하고 공부하는 삶을 살면서 30년 동안 마음의 기초체력을 쌓아왔다.
물론 지금도 불쑥불쑥 자존감이 떨어질 때가 있기는 하지만, 탄탄한 기초체력 덕분에 금방 강한 자존감으로 일어선다.
암 선고를 받고 무너질 뻔했던 자존감도 마음의 기초체력 덕분에 버텨내고, 사람들 앞에 당당히 암환자임을 밝히고, 1년간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그들 앞에 당당히 나아갔다. 내 마른 몸을 예쁜 옷으로, 화장으로 치장하게 다시 예쁜 모습으로 나섰다.
왜냐하면 나는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니까.
내 친구도 마음의 기초체력을 쌓아가기를.
어쩌면 그녀는 지금 그 과정에 있는지도 모른다.
섣불리 내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자.
친구야. 미안하다. 우리가 자주 만나지 못해서 서로에게 오해가 있는 걸 수도 있지.
우리가 인연이 여기까지면 할 수 없지만, 혹시라도 다시 얘기할 수 있거나 만날 수 있다 면 이런 얘기를 나누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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