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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책 읽기

마흔에게 - 기시미 이치로 -

by 짱2 2021. 5. 22.

기시미 이치로의 전작 '미움받을 용기'에서는 '알프레드 아들러'의 이론을 앞으로 드러내며, 인간관계, 나에게로의 집중을 크게 다루었다면, 이 책은 '나이 듦', '공헌'이라는 것에 좀 더 초점을 맞춘 것 같다. 하지만 큰 맥락에서는 같은 결이라고 생각이 된다. 다만, 이 전 글에도 썼듯이 대화체의 형식에 집중이 되지 않았던 탓에 나는 이 책이 더 마음에 와닿았다. 공감하는 부분이 더 많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더 많았다.

 

이 책은 몇 군데 기록하고 싶은 구절이 있는데, 이것들은 세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될 수 있겠다. 첫째는 나이 듦, 죽음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아들러와 관련된 이론이고, 셋째는 지금, 여기에 관한 내용이다. 세 가지 내용 모두 크게는 같은 맥락이겠으나 나누어 놓으니 내 자신이 훨씬 이해하기 쉽고, 나의 인사이트를 정리하기도 좋다.

 

1) 나이 듦

 

나이 듦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약화 혹은 퇴화라고 보는 시각입니다. 그러나 저는 노화를 퇴화가 아니라 변화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나이가 들면 젊은 시절에 할 수 있었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고 병에 걸리기도 쉬워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를 퇴화로 보지 않고 변화로 인식하면 나이 듦에 대해서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공부를 하면 경쟁에 내몰리거나 결과를 내라고 독촉받게 됩니다. 하지만 중년이 되면 평가나 평판에 개의치 않고 순수하게 배우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이 든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이유는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수많은 악 가운데 가장 두려운 것으로 꼽히지만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죽음이 존재할 때는 이미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에피크로스)'

 

아무리 나이가 들어서 연찬을 거듭해도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는 걸 알고 자신과 끊임없이 진지하게 마주하고 생각하는 작업이 '철학한다'라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철학은 오십부터'라고 말했습니다. 이 나이가 되어 이제 철학을 배우는 건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늙었다고 해서 지력이 쇠퇴하지는 않습니다. 외려 철학을 하려면 오래 살며 익혀온 지혜와 경험이 필요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행복하게 산다는 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싶다면 철학 책을 꼭 읽어보길 바랍니다.

 

젊을 때부터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노년에 접어든다고 해서 힘들고 괴로운 일만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늙는 것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 너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주어진 노년을 어떻게 활용할지만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암환자가 되면서 죽음을 마주했었던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죽음이 뭔지 몰라서 두렵다. 암에 걸린 후, 지난 2년간 죽음과 관련된 책을 읽으며,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고, 또한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옆으로 이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세상은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그리고 언제 올지 모를 죽음을 두려워만 할 이유가 없다. 현재에 충실히 살다 보면 알아서 찾아올 테고, 그때가 되면 그때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될 터이다.

 

쉰네 살의 나는 이미 늙음을 겪고 있으나, 이것이 마냥 싫지만은 않다. 젊어 보이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목적이지는 않다. 그저 귀여운 소망일 뿐. 작가의 말처럼 나이 들어서의 배움은 더 이상 남과의 경쟁이 아니다. 오롯이 나만의 지적 욕망을 위한 것이다. 인생을 더 잘 알고 싶고, 더 잘 이해하고 싶고,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으로 계속 공부하고, 사색하는 시간을 갖는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고로 이 세상과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행복한 삶을 충만하게 누리고 싶다는 나만의 큰 욕심이다. 죽음이 찾아오는 그 순간까지 나의 배움은 끝이 없으리라.

 

2) 아들러와 관련된 내용

 

아들러가 말하는 불완전함이란 인격의 불완전함이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일에 대한 지식과 기술에 대한 불완전함입니다. 새로 시작하는 일을 시작하면 그 즉시 '잘하지 못하는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새로 시작한 일이니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게 '잘하게 되는'것의 첫걸음입니다.

 

아들러가 말하는 진화는 위가 아니라 '앞'을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을 가리킵니다. 즉, 누군가와 비교하여 '위냐, 아래냐'라는 기준으로 측정하는 게 아니라 현상을 바꾸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는 것이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만이 아니라 여태까지 해온 일을 차근차근 계속하면서 하루하루의 삶을 즐기기 위해 틈틈이 요리조리 방법을 궁리하는 시간도 소중한 '한 걸음'입니다. 

 

아들러가 말하는 '건전한 우월성의 추구'에는 이상적인 모습에서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감점법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 올린 것을 하나씩 더해가는 가점법으로 평가하는 눈이 필요합니다. 

 

'내가 가치 있다고 생각할 때 용기는 생긴다.' 여기에서 말하는 용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과제에 도전하는 용기입니다. 왜 용기가 필요하냐면 과제에 도전하면 결과가 명확해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과제의 결과가 자신이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은 과제에 도전하기를 주저합니다.

또 하나의 용기는 인간관계를 맺는 용기입니다. 타자와 관계를 맺으면 마찰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미움받거나, 배척당하거나 배신당할 수도 있겠죠. 그게 두려워서 '미움받고 상처 받을 바에야 타자와 관계를 맺지 않는 편이 나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고 아들러는 말했습니다. 이처럼 살아가는 기쁨과 행복 또한 인간관계 속에서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작가의 전작 '미움받을 용기'에서의 내용과 같은 흐름이다. 작가는  자신을 극복할 용기, 타자와의 관계를 맺을 용기를 요구한다. 그것만이 과거의 나에게서 벗어나 더 나은 '나'로 변화할 수 있다고 한다. 과거로부터의 트라우마와 같은 비겁한 변명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나는 번데기가 꼬치에서 나와 나비가 되듯이, 타고난 신체적 결함, 폭력적인 아빠로부터의 트라우마, 내성적 성격 따위의 것들로부터 부단히 노력하면서 지금의 나를 만들어왔다. 나를 이끌어 줄 사람은 전혀 없었고, 그곳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충고해준 이도 없었다. 다만 늘 나를 사랑해주셨던 엄마가 계셨고, 그런 현실을 싫어했고 벗어나고 싶어 했던 어린 내가 있었고, 세상을 향해 열린 순수했던 나의 열정이 있었고, 책이 있었다. 더불어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술과 담배, 남자, 우울증이 내 삶을 깊게 훑고 지나갔고, 암환자라는 결과물까지 얻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마저 도 나에겐 비겁한 변명거리로 전락하지 않았다. 나를 한걸음 더 앞서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뿐. 

 

아~ 이럴진대, 어찌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3) 지금, 여기

 

'행복은 존재와 관련되어 있지만 성공은 과정과 관련돼 있다.' 행복이 존재한다는 말은 행복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성취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에게는 '지금, 여기'에 이미 행복이 '있는 것'이죠. 인간은 그 어느 때라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앞날을 염려한다는 건 '지금, 여기'를 소홀히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를 소중히 여기며 살지 않으니 앞날이 걱정되는 겁니다.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를 놓아주는 결심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일만을 걱정하면 지금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하루하루,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으니 내일의 과제는 내일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 여기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참 많다. 누군가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꺼내 든다. 잠시의 추억 소환이라면 충분히 공감하지만, 자랑이라는 카드로 꺼내 드는 사람을 보면 난 그 사람과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현재에 대해 얼마나 할 이야기가 없으면 과거를 꺼내들까. 현재를 이야기하기도 바쁜데 말이다. 

 

미래는 말해 뭣하랴. 사람들은 현재에 안주해버린다. 그리곤 앞으로 향해 가려는 사람들을 향해 야유를 보낸다. 그만 좀 열심히 살라고. 뭘 그리 힘들게 사느냐고. 이런 사람을 향해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던 나에게 김미경 원장은 적절한 말을 던져주었다. '현재의 내가 고통받으면 '고생하는 중'이 아니라 미래의 내가 '성공하는 중'이라고. 

암환자가 되어서 막강 파워 통증과 설사로 고통받으면서도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좋은 동영상을 보면서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던 나에게, 아직 고통과 설사에서 벗어나지 않은, 갓 항암에서 벗어난 상태로 다시 직장으로 복귀하는 나에게 많은 이들은 염려와 걱정을 던졌다. 그때는 그것이 염려와 걱정이라고 믿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내가 선택한 그 삶을 잘 살아내고 있음에도 여전히 주변에서 염려와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그만 좀 힘들게 살라고 하는 조언을 들으며 그것이 더 이상 염려와 걱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질투였다. 자신들은 감히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하고 있는 나의 삶이, 그래서 자꾸 변화를 꿈꾸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나를 향한 질투의 다른 이름이었다. 나는 이제 그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친다. 난 지금 성공하는 중이고, 현재의 고통은 온전한 고통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덤을 동반하고 있다고. 그러니 더 이상 내 삶에 관여하지 말고, 너나 네 삶을 돌아보라고. 쉽게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지 말라고. 

 

책의 내용을 요약하고 보니, 작가가 말하는 공헌에 대한 부분이 없다. 공헌은 인간관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사람은 서로에게 어떤 형태로든 공헌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고, 어쩌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삶 전체가 서로에게 공헌하며 사는 과정이기에 다른 곳에서 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