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울 줄 알았다. 탯줄을 끊고 반백 년을 살면 웬만한 시련에도 눈 한번 감아낼 강인함이 생길 줄 알았다. 일을 구하고 사랑을 알고 살 곳을 정하고 후세를 만나는 고된 시기를 넘었으니 미끈하고 노련해질 거라고도 생각했다. 정치, 경제에 대한 독해력이 생길 줄 알았고 무엇보다 불필요한 경쟁의 늪에서 벗어나 안정과 번영의 강가를 걷고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프롤로그에 쓰인 작가의 말에 크게 공감한다. 반백 년을 살면 그럴 줄로만 알았는데, 별반 다르지 않은 나를 발견하고 시시해졌었다. 나이만 먹어갈 뿐, 육체만 늙음으로 나아갈 뿐, 정신연령은 '만년 대리'처럼 한 곳에 머물러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아이일 때는 어른이 되면, 스무 살이 넘어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는 진짜 어른이 되면 성숙한 어른의 모습일 줄 알았는데, 물리적인 어른이 되었을 뿐이었고, 작가의 말처럼 오십 년을 살면 분명 변화가 있을 거라 믿었는데, 그것 역시 나의 막연한 믿음일 뿐이었다. 세월은 그저 육체에 자신의 흔적을 주름으로 남겨둘 뿐 얄팍한 계산법, 철없는 이기심 따위와 같은 속 좁은 내 안의 부끄러운 것들을 옅어지게 해 주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삶의 지혜, 나만의 철학과 같은 고차원적인 멋짐을 선물해주지도 않았다. 나는 그렇게 어리석은 한 명의 지구인으로 오십을 시작하고 있었다. 불확실한 자신에게 못난 습관을 물들여두고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었다. 여유롭고 성숙한 어른의 모습이 아닌, 젊은 날부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그것이 인생사는 즐거움인 줄 착각하며 만들어온, 나를 망가뜨리고 부수는 못난 삶의 바통을 이어받아 힘없이 달려가는 50의 삶을 버둥거리며 살고 있었다.
만약 2018년이 저물어가던 그때, 내 나이 만으로 50이었던 그때, 암환자가 되지 않았다면, 별반 다르지 않은 50대의 삶을 질질 끌고 갈터였었다. 하느님은 그 꼴을 보기 싫으셨나 보다. 바보 꼴로 멍청하게 삶을 낭비하고 있는 나의 뒤통수를 크게 내리 치셨다. 위암, 대장암...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를... 암덩이 두 개를 던져주며 이래도 똑같이 살 테냐고 호통을 치셨다. 덕분(?)에 나는 아주 쬐끔은 강인함이 생겼고, 경쟁의 늪에서 오래 허우적거리지는 않게 되었다. 50년의 삶, 아니 어린 시절은 나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30년의 삶에서 나를 망치도록 방치해두었던 그 부분들을 깨끗이 날려 버릴 수 있는 한방을 멋지게 날려주셨다. 암환자가 된 것이 다행이라고 한다면 웃픈 일이지만 말이다.
톨스토이가 옳았다. 세월은 나의 젊음을 빼앗아갔지만 수만 가지 이유의 불행도 함께 태워버렸다. 행복의 이유도 단순화시켰다.
눈가의 주름, 탄력이 없어진 피부, 늘어가는 흰머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나이가 되어가면서 가끔씩은 믿기지 않다가도 내 아이의 나이가 이십 대를 지나 삼십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젠 그들의 젊음에 내 늙음을 내놓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 속 이야기가 그저 지어낸 이야기만이 아닌, 현실의 삶은 드라마보다 더할 수 있음을 알아가면서 나의 이런저런 불행도 망각 속으로 스러져가고, 가족과 함께 하는 지금의 행복 속에 모두 묻혀졌음에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오십을 넘은 나이가 내게 주는 가장 큰 기쁨이 이것이리라.
건강한 사회는 읽은 책만큼의 값을 받는 사회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 누구는 노인이 되고 누구는 좋은 어른이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 젊었을 때는 먹고사느라, 마음이 뜨거운 외골수라 가까이할 수 없었던 책들을 한 뼘 가까운 곳에 두는 것이 나이 먹는 첫 번째 준비물이 되겠다. 사는 일은 코미디, 멜로, SF, 신파, 공포 등 모든 장르가 생중계되는 일이니 어느 한 분야만 고집할 게 아니라 두루두루 관심을 가지는 것도 좋겠다.
나이가 들면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좋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고, 나보다 열 살이 많은 지인은 나이 들어 희미해지는 시력을 탓하며, 너도 나이 들어보라고 눈을 흘긴다. 세상에. 책 읽기 가장 좋은 나이에 눈 건강이 발목을 잡는구나. 아직 건강한 눈을 장착한 지금, 열심히 책을 읽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사실 책 읽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저자의 글솜씨에 부러움이 한가득이었다. 어쩜 이렇게 맛깔나게 쓸까? 배우고 싶은 글솜씨. 머릿속에 저장해 두고 지인들과 이야기 나눌 때 써먹고 싶은 글귀들이 넘쳐났다. 부럽고도 부러울 뿐이다.
상대평가는 늘 우리를 불행하게 했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랬다. 남을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는 데만 오십 년을 보낸 후유증으로 여전히 남의 소식에 귀 기울이는 데 익숙하고 그 결과로 쉽게 절망하겠지만, 이제부터는 내 손아귀에 있는 보물부터 살펴야겠다. 알라딘은 램프 속 요정 '지니'가 약속한 세 가지 소원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가진 셋에 감사하지 못하고 열을 가진 사람을 바라보는 습관 때문에 나는 절대적인 안정을 이뤘으면서도 여전히 빈곤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딱 50년이 걸렸다. 상대평가로부터 조금은 여유로워지는데... 2년째 주문처럼 매일 쓰고 있는 문구가 있다. '어제보다 나은 나를 위해 오늘을 잘 산다.' 난 이제 남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한다. 내일의 '나'를 위해 열심히 살아내는 오늘의 '나'를 응원하고 사랑한다. 그렇게 집중하며 나를 절대평가하니, 자연스럽게 남과의 비교를 내려놓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내공이 부족하다고 종종 느낀다. 결론은 돈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때, 그 앞에서 무릎 꿇게 될 때, 처참히 무너져내리는 절대평가. 어쩌랴! 다시 추스를 수밖에.
이십 대는 나를 선택해준 일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했으니 오십 대의 일은 내가 선택한 일에 최선을 다해보고자 한다. 타고난 재능, 잘 다듬어진 재주로 사는 것도 좋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하고 싶은 일 한 번쯤은 시도해본 뒤에 칠십 대를 맞이하고 싶다.
이십 대에 자신을 선택해준 일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했다는 작가는 행복하겠다. 나는 그런 일을 만나지 못한 채 40년을 살았고, 40이 넘어서 찐공부를 했고, 영어강사가 되었다. 나중에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 감사하다. 이런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맛도 보았으니 이제 앞뒤 가리지 않고 하고 싶은 일 해보고자 한다.
기어이 오십, 꿈꾸기에 적당한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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