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감사일기를 쓴다. 매일 감사할 일이 뭐가 있을까... 싶지만, 있다. 매일 세 개의 감사를 쓰는데, 첫 번째 감사는 늘 똑같다. '오늘도 복되고 소중한 하루를 제게 선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년째 계속 같은 글을 쓰니 이젠 암기가 되어버린 소중한 하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다. 암환자가 된 이후, 죽음을 마주한 이후, 하루하루가 정말 소중하다. 가끔은 하루라는 개념을 잊고 하루를 살아가지만, 흘러가는 하루가 아쉬울 만큼 정말 복되고 소중하다. 아침에 눈을 뜨고, 잠들 때까지 흘러가는 시간이 아쉽고 아련하다. 그래서 나의 첫 번째 감사는 하루라는 선물에 대한 마음이다.
나머지 두개의 감사함은 매일 바뀐다. 어제와 같은 감사를 오늘 떠올릴 때도 있고, 새로운 감사함이 넘쳐흐르는 날도 있고, 예전에 느꼈던 감사함이 다시 되살아나기도 한다. 어차피 나의 삶이 거기서 거기인데, 뭐 특별한 것이 있을까? 하지만 감사한 마음은 늘 특별하다.
오늘은 감사일기를 쓰다가 내가 미리 구입해 둔 다이어리 속지가 2년치 정도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세상에~ 이렇게 넉넉한 삶일 수가. 내 주변을 돌아보니 넉넉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을 추수가 끝났기에 미리 사놓은 현미쌀과 백미 쌀이 총 40킬로그램이 뒷베란다에 고이 모셔져 있고, 장롱 안엔 수십 개씩 되는 속옷과 매일 갈아입으면 1년을 채울 옷들, 창고에 넣어둔 휴지, 비누와 같은 생활용품들, 냉동실에 꽉 찬 음식들, 잔치를 치러도 될 넉넉한 식기류. 넉넉함이 흘러넘치는 삶이다. 미니멀 라이프를 꿈꾸지만 맴시멈라이프를 내려놓지 못하는구나.
참 많은것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으며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다시 한번 되돌아본다. 따뜻한 공간에서 따뜻한 밥 지어먹으며,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거. 가족의 따뜻한 사랑을 넘치도록 받고 살아가고 있다는 거. 암환자가 되기 전엔 스스로 만든 못난 습관들 때문에 힘겹게 삶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암환자가 되면서, 위와 대장을 잘라내는 아픔을 겪으면서 새롭게 만들어가는 예쁜 습관들 덕분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유롭지 않았던 마음이 사라지고, 내가 가진것들이 얼마나 넉넉한지, 넉넉하다 못해 넘쳐흐르고 있는지 깨닫는다.
암환자가 된 이후 3년이 되어가도록 내가 잘 살고 있음은, 내 주변의 넉넉함이 아닐까? 내가 원하는대로 가질 수 있는 넉넉한 경제력이 있었고, 폭신폭신 부드러운 사랑이 넘치도록 가득했고, 죽음을 초월한 넉넉한 나의 마음이 있었다. 넉넉하다는 거. 여유로웠다는 거. 평온했고, 평화로웠고, 행복했다. 아파서 데굴데굴 굴렀지만, 오로지 아픔 한 가지만이 나를 괴롭힐 뿐, 그 아픔이 사라지면 나는 다시 평온했고 행복했다. 3년이 지난 지금은 데굴데굴 구를 만큼의 아픔도 없고, 평온함과 행복이 더욱 커졌다. 감사의 마음이 더 커졌다.
오늘 아침, 넉넉한 다이어리 속지 덕분에 내가 얼마나 감사한 삶을 살고 있는지, 암덩어리가 그저 미운 존재가 아니라 또 다른 삶을 살아가도록 나를 이끌어준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 안에 암이 존재하는지, 수술로 완전히 제거가 된건지 나는 알 수 없다. 그저 소중한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넉넉한 살림살이에 감사하며, 넉넉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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