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항암으로 힘들 때 구입한 페이스 오일이 있다. 5만 원에 달하는 가격을 주고 산 나름 비싼 오일이었는데, 얼굴에 바르면 참 촉촉하니 좋았다. 바를 때는 스며들지 않는 느낌이지만, 물론 바른 후에도 얼굴에 손을 대면 오일이 묻어나긴 하지만 촉촉한 느낌이 좋았고, 화장을 하면 물광처럼 느껴지는 것이 보기 좋았다. 이런 이유로 화장이 잘 받지 않을 것 같은 날엔, 또는 특별한 날엔 이 오일을 바르곤 했는데,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아 5분의 1 정도 남은 상태로 화장대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 오일은 특유의 향이 있는데, 오래전부터 맡아왔던 향수냄수 같기도 한, 꽤 올드한 향이었고,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마침, 오늘 문득 이 오일이 눈에 들어와 세면을 한 후에 바르게 되었는데, 코끝에 닿는 그 향에, 그리고 일기를 쓰는 지금도 계속 나에게 풍겨지는 이 향에 토할거 같은 느낌이다. 오일의 향이 변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향이 불러일으키는 항암의 시간이, 항암 하던 그 시간의 구역질 나던 역겨움이 올라오는 탓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3년이 가까운 시간이 흐르도록 내 후각과 내 온몸의 감각이 그것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참 힘든 시간이었는데, 그래서 내 온몸의 세포가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 나의 뇌는 그것을 잊은 척하고 있었다. 바쁜 일상 탓에 잊은 줄 알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젠 이 오일을 바르지 못할거 같다. 버리기 아까우니, 발에 바른 후, 비누로 손을 씻어야겠다.
위의 반을 절제하고, 대장의 3분의 1을 절제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의사에게 물어보았다. 그렇게 다 잘라내도 사람이 살 수 있는 거냐고.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때의 나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사람이기를 포기했었을까? 사람으로서 살고 싶은 악착스러움이었을까? 나의 현실이 어떠하든, 남에게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을까? 삐쩍 마르고, 초췌한 모습, 예전의 예뻤던 내 모습은 전혀 없고, 할머니 같은 모습으로, 매일 토하고, 매일 설사하고, 못 먹고, 아파하고... 상상은 틀렸다. 의사가 옳았다. 그렇게 내장기관을 다 잘라내도 사람은 살 수 있었다. 보통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기적'이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까? 내가 '기적'을 만든 걸까? 모든 암환우들이 매일의 기적을 만드나 보다.
그런데 나에겐 그 기적 이면에 반전이 있다. 밥을 먹고, 변을 보고, 일상의 삶을 산다. 여기까지는 다른이들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예전에 먹던 밥의 양의 3분의 1일 심지어는 5분의 1밖에 먹지 못한다. 또한 재발, 전이가 걱정되어 좋은 음식만 먹어야 한다. 맵고 짠 음식, 인스턴트 음식, 식당 음식 등은 가려먹어야 한다. 잘못 먹으면 처음 한술 먹은 후, 식도에서 꽉 막혀 토해내야 한다. 아니면 천천히 내려가도록 잠시 쉬어줘야 한다. 이럴 땐 침도 삼키지 못한다. 막힌 배수관에 뭔가를 더 쑤셔 박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바나나 같은 황금똥은 일주일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들다. 매번 설사를 하고, 그런 설사를 하루에 여러번 한다.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으면 바로 배가 아프고, 급설사를 부른다. 설사를 하고 난 후엔 머리가 아프고, 체력이 훅~ 떨어진다.
이게 일상이다. 하루에 세끼가 아니라 여섯끼를 먹어야 한다. 식도 막힘, 배아픔, 설사를 여섯 번 반복할 수도 있다. 체력 저하를 여섯 번 경험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루가 간다. 어떤이들은 이런 하루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기력이 소진되어 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떠한가? 여느 주부와 똑같이 살림을 한다. 물론 어린아이들이 있는 집과는 다르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겠다. 남편과 둘만 살고 있으니, 어지럽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음식도 2인분만 준비하면 된다. 그래도 청소, 빨래, 음식 준비 등 모든 일을 내가 다 한다. 남편이 도와주는 부분도 있지만, 내가 직장을 그만둔 이후로 집안일은 거의 내 몫이다.
주부로서의 생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생으로서의 역할이다. 사회복지사 과정의 대학을 다니고, 김미경 유튜브 대학에서 타로, 캘리, 유튜브, 코딩을 배우고 있고, off라인으로 캘리그래피와 유튜브를 들으러 일주일에 두번 센터에 간다.
독학으로 영어공부를 계속 하고 있고,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독서까지. 내가 생각해도 빡빡한 일정이다. 하루에도 여러번 체력저하를 느끼며 이런 일들을 해내고 있다.
요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이런 삶이, 이런 삶에 대한 열정이 '기적'을 만들었을까? '기적'의 이면에 있는 급설사, 배아픔이 내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데, 이런 체력의 한계를 무시하고 앞으로 전진하는 나의 삶의 방식이 또 다른 '기적'을 일으킬까? 나를 무너뜨릴까?
나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을까? 다 내려놓고, 소파에 편안히 누워 책 읽고, 영화보고, 친구들 만나 수다나 떨면서 살지 못할까? 예전부터 해왔던 삶의 태도를 바꾸지 못하는 탓일까? 암경험자로서 더 나은 삶을 살아야만 보상받는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일까? 남에게 암환자가 아니라는, 너보다 더 잘살고 있다고 보이고 싶은 욕심일까? 꿈이 없는 나를 상상할 수 없음일까?
다 맞기도 하고, 다 아니기도 한데, 정답을 알고 싶어 이렇게 상상을 해 본다. 모든걸 내려놓으면 어떨까? 정말 뒹굴뒹굴 살아보면 어떨까? 책을 좀 더 읽겠지? 운동을 좀 더 하겠지? 음식을 좀 더 신경 써서 해 먹겠지? 남편과 좀 더 놀아주겠지? 친구들을 좀 더 자주 만나겠지? 그리고 심심해 죽겠지???
생각 이어서일까? 심심할 거 같다. 무력감이 들 것만 같다. 또 어쩌면 그럭저럭 잘 살 것도 같다. 직장을 그만둔 후에 잘 살고 있는 걸 보면... 오늘부터 3일간 아무것도 하지 말아 볼까? 내가 만든 '기적', 앞으로 만들어갈 '기적', 그리고 '나'라는 '기적'을 사랑하고, 멋진 꿈을 꾸길 바란다. 그렇기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고, 그것을 해나가길 바란다. 행복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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