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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책 읽기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 파스칼 브뤼크네르 -

by 짱2 2022. 2. 16.

노년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중년인 나에게도 멀게 느껴지는 노년이 어때야 하는지 풀어내고 있다. 항암을 하며 말라버린 내 몸은 사실, 어떤 때는 노년의 몸처럼 느껴진다. 보이는 모습도 그러하고, 체력적으로도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17세 소녀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도전하고, 열심히 살아내는 삶의 연속이다. 그러다 보니, 내 몸의 현실과는 다르게 나의 노년은 아직 먼 미래로 보여지나, 또 아픈 나에게 노년이라는 시간이 오기나 할런지도 의심스럽지만, 별다른 일이 없다면 내가 마주해야 할 시간일 테다. 

 

 

 

나의 노년은 어떨까? 아프지만 않으면 지금처럼 멋지게 살아낼 자신이 있는데. 역시 건강이 제일 첫 번째 과제다.

 

결국, 까놓고 보면 사기다. 과학 기술이 늘려준 것은 수명이 아니라 노년이다. 죽기 직전까지 우리를 쌩쌩한 30대, 40대의 외모와 건강 상태로 살게 해 준다면, 혹은 우리가 선택한 연령대로 살아가게 해 준다면, 그게 진짜 기적일 것이다. 

 

너무나 현실적이지 않은가! 과학기술은 노년기의 기간을 늘려놓았을 뿐이다. 나는 이런 연장된 노년기를 살고 싶지 않다. 불로 장생하고 싶지도 않다. 아프지 않은 채로 살다가, 편안히 눈감고 싶은 게 모든 이의 한결같은 마음일 거다. 

 

어쨌든,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몸은 우리에게 말한다. 미래는 아직도 가능해, 내가 따라준다는 조건에서 말이지 너희가 나를 존중하지 않으면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정확하다. 나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고, 또 현재 진행형이다. 술로 범벅이 된 생활,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나고, 운동 안 하고, 식사도 대충 하는 내 몸을 아끼지 않는 삶이 나를 암환자로 몰고 갔다. 당연한 결과였고 예상했었다. 

 

 

어딘지 모를 곳에서 와서

누구인지 모를 자로서 살며

언제인지 모를 때 죽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가는데도

나 이토록 즐거우니 놀랍지 않은가.   -마르티누스 폰 비버라흐 (16세기 독일의 성직자) -

 

'내 인생은 이런저런 반복들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지 모른 채 누구인지도 모르며 살아가는 우리, 매일의 일상을 반복하며 사는 우리. 지루한가? 무의미한가? 삶이? 전혀 그렇지 않다. 

 

질서와 기강은 스쳐 지나는 시간의 괴로움에서 우리를 구해주고, 권태마저도 안전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일과에 복종함으로써 내적 시간의 흐름을 죽이다니, 기막힌 역설 아닌가. 시간을 죽이고 싶거든 일분일초도 어김없이 일과표대로 살아가라.

규칙은 사람을 안심시키고 방향을 잡아준다. 마음의 짐을 규칙에 내려놓고 놀라운 에너지를 끌어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자기를 다잡고, 시간표를 세우고, 무엇을 하느냐에 상관없이 시간을 촘촘하게 나누었다. 하루, 한 주를 작은 단위로 반드시 나누어야만 했다. 또한 하루를 의례처럼 고정된 처방에 따라 시작해야만 했다. 청소, 책상 정리, 정해진 순서에 맞춰 옷 정리하기, 가벼운 체조 등등. 의식(rituel)은 일상의 기도다.

 

일과에 복종함으로써 내적 시간의 흐름을 죽인다니... 얼마나 멋진 말인가! rituel대로 사는 것, 일상의 기도, 촘촘하게 나누어진 시간을 꼼꼼하게 살아가는 것.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는 이미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어야 할 대목이다. 아! 잘 살고 있었구나, 잘했어, 쓰담쓰담...

 

 

좋아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늦게까지 하라. 어떠한 향락이나 호기심도 포기하지 말고 불가능에 도전하라. 생의 마지막 날까지 사랑하고, 일하고, 여행하고, 세상과 타인들에게 마음을 열어두어라. 요컨대 흔들림 없이 자기 힘을 시험하라. 

 

20세든 80세든 하면 된다. 담대함이란 돌이킬 수 없는 숙명에 지지 않는 것이므로. 

 

오지 않은 노년에도 내가 이러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보장은 못하겠다. 내가 노년이 된 그 시대엔 이런 삶이 당연한 삶의 형태일지 그것은 더더욱 모르겠다. 다만 현재의 나는 이렇게 살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용기내고, 도전하고, 호기심 넘치는 삶을 살 거라는 것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나의 호기심은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게 했고, 그 도전이 헛되이 끝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했고, 그 노력의 결실을 얻으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어떤 모습의 성공이든 만들어냈고, 꿈을 이뤄가고, 그것이 돈으로도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여행을 속히 마치지 마시오.

여행은 오래 지속될수록 좋고

그대는 늙은 뒤에 

비로소 그대의 섬에 도착하는 것이 낫소.

길 위에서 그대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참으로 멋진 글이다. 나는 이 글을 읽은 후, 조급한 내 마음을 내려놓았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을 그토록이나 많이 들어왔음에도 뭔가 빠르게 이뤄야 할거 같은 초조함이 있었다. 뭔가 눈에 보이는 결실이 있어야만 할거 같았다. 그러나 여행을 속히 마쳐서 뭘 하나?라는 질문을 던지면 답이 보였다. 여행의 과정에서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함께 여행하는 사람과의 교감과 따뜻한 말 한마디, 사랑의 감정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빨리빨리 길을 재촉하며 놓치는 아름다운 들꽃, 저녁놀을 언제 다시 마주할 수 있겠는가! 서두르지 말자. 뭘 하든, 뭘 배우든. 못한다고 주눅 들지도 말자.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중요할 뿐! 내 마음에 맞는 사람과 만나서 나누는 대화, 정... 이런 따뜻함이 나는 좋다.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찰나의 영원뿐이다. 사랑하는 동안, 창조하는 동안 우리는 불멸이다. 생이 언젠가 우리를 떠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다음 세대에게 희열을 넘겨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충분히 생을 사랑해야만 한다.

 

다음 세대에게 희열을 넘겨준다. 거창하다. 나는 다음 세대인 내 아이에게, 그리고 그다음 세대인, 언제가 내 품에 안게 될 내 손주에게 나의 꿈과 희망, 열정, 도전정신을 넘겨주고 싶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았고, 얼마나 착하게 살았으며, 얼마나 진솔하게 살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삶을 사랑했는지, 또한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