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
과거의 나를 과감히 버리는 용기
'창세기' 1장을 저술한 유대 지식인은 '바라(bara)'라는 히브리 단어로 '창조하다'를 표현했다. '바라'는 동사의 피상적이며 거친 의미는 '(빵이나 고기의 쓸데없는 부위를) 칼로 잘라내다'이다. '창조하다'라는 의미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요리사나 사제가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의 쓸데없는 것을 과감히 제거해 신이 원하는 제물을 만드는 것처럼, 창조란 자신의 삶에 있어서 핵심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자신의 삶의 깊은 관조를 통해 부수적인 것, 쓸데없는 것, 남의 눈치, 체면을 제거하는 거룩한 행위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작가는 이미 그의 책 '에디톨로지'에서 편집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기존의 것의 편집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지금 읽고 있는 그의 책 '창조적 시선'에서는 독일의 '바우하우스'에서 비롯된 편집의 과정, 즉 창조에 대해 더 깊이 이야기하고 있다. 아직 그 책의 10분의 1도 채 읽지 않아, 작가가 근본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읽어내지는 못했지만, 그의 전작 '에디톨로지'로 미루어 짐작컨대,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감한 제거와 자신만의 깊은 관조를 통해 발현되는 것이라는 말을 전달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배철현 교수는 부수적인 것, 쓸데없는 것, 남의 눈치, 체면을 제거하라고 한다. 아직 많이 모자라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보다는 많이 버렸다고 자부한다. 남에 대한 배려는 하지만, 남의 눈치를 보지는 않는다. 남이 불편할까 주변을 살피지만 나의 체면을 위해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는다. 쪽팔림을 참을 수 없지만 그래서 쪽팔릴 행동을 하지 않을 뿐이지 남의 시선이 많이 두렵지는 않다. 하지만 아직도 제거해야 할 것들은 많다. 쓸데없는 것, 부수적인 것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내 나이 60이 될 때쯤에는 주렁주렁 매달린 그것들이 툭, 툭 떨어져 나가 훨씬 홀가분해져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60이 넘고, 70이 넘어가고, 죽음으로 다가갈수록 내 삶의 핵심을 찾고, 모든 것 훌훌 털어버리고 가뿐하게 저 세상으로 건너갈 수 있기를...
영어로 안식일을 뜻하는 '사바스(sabbath)'는 원래 히브리어에서 유래했는데, 그 본래 의미는 '습관적으로 하던 일을 멈추다'이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어제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창조적인지, 목숨을 걸 만한지 돌이켜보라. 그저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이라면 과감히 잘라내자. 그것만이 우리를 다시 '처음'의 순간으로 진입하게 해줄 것이다.
나에겐 루틴이 있다. 매일 똑같이 반복하는 습관.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들 때까지 온통 루틴으로 반복되고 있다. 귀찮아서 하기 싫은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이미 몸에 굳어진 그것들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다. 가끔은 지겨움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귀차니즘이 발동한 날은 미칠 듯이 하기 싫지만 몸이 먼저 그것을 하고 있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날이 훨씬 많지만, 가끔은 따분한 삶이라고 느껴지기도 하고, 또 이런 지겨움이 계속된다는 것은 내 삶에 특별한 것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다행스러움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뭐, 재미있는거 없을까?' 하면서 지인들에게 전화 걸고, 두리번거리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면, 어리석었다는 자책도 있지만, 한때의 젊음이 가져다주었던 일종의 도전정신(?)이기도 하였으리라 위안도 해본다. 그리하여 남들보다 이야깃거리 많은 재미있는 삶을 살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잠시 멈추라고 한다. 지금 나에게 굳어진 그것들이 얼마나 창조적인지, 목숨을 걸 만한것인지 돌이켜보라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목숨을 걸 만하지 않다. 내 삶 자체가 그다지 목숨 걸 만큼 강렬하지 않다. 잔잔하게 살아갈 뿐. 그럼 창조적인가? 처음엔 전혀 창조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냥 삶 자체니까. 내가 좋아서 내가 만든 습관이고 루틴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모여 내 삶을 만들어낸다. 오늘의 이것들이 더 나은 나를 만들어낸다. 그러하니 창조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목숨 걸 만큼의 강렬함은 아니지만, 매일의 습관이 만들어내는 내일의 나, 1년 후의 나, 10년 후의 나는 정말 기대된다.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모여 세월이 흐른 후의 나는 또 어떤 창조적인 모습의 나를 만들어 낼 것인가!
뿐만 아니라 나는 매일 나 자신을 성찰한다.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뺄지 고민하고, 이것과 저것의 조합을 생각하고, 진정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늘 깊이 들여다본다. 오늘 즐거웠는지, 힘들었는지, 무엇을 배웠는지 알아가는 것이 즐겁다. 그자리에 머문 내 모습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간 나를 보는 것이 행복하다.
아마도 매일 다이어리를 쓰고, 일기를 쓰고, 책 읽고, 명상하는 삶이 이런 나를 만들었으리라. 비록 깊고 심오한 성찰의 그것까지 끌어내지는 못할지라도, 폭넓은 지식으로 멋진 언어의 향연을 펼치지는 못할지라도 나만의 방식으로 나를 알아가니 다행스럽다. 잘 살아주고 있어 대견하다. 내 육체의 고통이 나를 끌어내리는 날이 있지만, 깊은 우울감의 한 자락이 내 삶의 의지를 잠시 꺾을 때도 있지만, 내가 만든 나의 루틴이 나를 다시 살려내니 그 또한 감사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