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아보게 하는 제3의 눈 묵상
배우는 관객과 자신의 몰입을 돕기 위해 어떤 물건으로 목소리가 나오는 입과 얼굴을 가린다. 이 물건을 '가면'이라고 한다. 라틴어로 가면을 뜻하는 '페르소나(persona)'에서 인간이라는 영어 단어 'person'이 파생했다. 인간은 원래 가면을 쓴 존재다. 이는 '가식적인 존재'라는 말이 아니다. '우주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유일한 배역을 알고 있는지, 그것을 알았다면 최선을 다했는지를 묻는 존재'라는 뜻이다.... 관객은 무대 위의 배우나 극 중 인물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제3의 눈으로 관조한다. 감정 이입과 관조, 몰입과 성찰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극장'이라는 뜻의 영어 '시어터(theatre)'는 "무대에서 비극적인 상황에 빠져 고민하는 자기 자신을 관조하는 장소"라는 의미다. 인류가 처음으로 스스로 제3자가 되어 자기 자신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나에게 맡겨진 유일한 배역을 나는 알고 있는가! 나는 누구이고 왜 이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걸까?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제3자가 되어 자기 자신을 보는 '극장'이 필요하고, 그 '극장'에서 몰입하여 관조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리라.
2003년쯤의 일이라고 기억된다. 2002년 월드컵이 있던 해에 나는 천주교 신자로 거듭나는 공부를 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내가 선택한 이 종교가 무엇인지, 하느님이 계신 건지, 성령이 있는 건지 정말 궁금해서 성서공부를 해보자 마음먹었다. 창세기, 출애굽기, 마르코 복음, 마태오 복음... 이렇게 4년에 걸친 공부를 했다. (그다음이 사도행전이었을 텐데, 어쩌다 보니 거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때 처음으로 묵상이라는 것을 했다. 성경말씀 하나에 온통 매달린 깊은 묵상. 물론 얕은 내 철학과 삶이 절절하고 심오한 것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나를 돌아보는 진정한 시간이었음을 기억한다. 어쩌면 그때의 그 시간이 나를 성장하게 했고,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에는 묵상의 소중함, 중요성 따위는 몰랐다. 그날의 주제에 대해 머리를 쥐어짰고,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과의 나눔의 시간에 적절한 이야기인지 그 수위에 대해 고민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시기에 좋았다' 등과 같은 말씀은 나라는 사람을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고, 여러 다른 말씀도 내 깊은 곳곳을 후비고 다녔다. 그때 그 시간이 참 귀하고, 시기적절한 것이었음을 인정한다.
50이 되면서 암환자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명상이 찾아왔다. 시간을 금처럼 생각하는 사람인지라 명상의 시간이 아깝고, 따로 명상의 시간을 갖는 것이 어색하여, 잠자리에 드는 그 시간에 누운채로 명상하는 시간을 갖는다. 사람들은 잠이 안 와서 걱정이라는 둥, 불면증이라는 둥 하지만 나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생각할 시간이 많아서 좋고, 바로 잠들어 버리면 숙면을 취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러하니 잠과의 전쟁도 없고, 푹신한 침대에 몸을 푹 파묻은 나를 의식하고, 내 몸 전체를 훑어보고, 내 머릿속 떠돌아다니는 것들을 찾아보기도 하는 평화로운 시간의 기쁨을 느낀다.
이젠 사람들 만나는 것보다 나를 의식하고, 나를 느끼고, 나에게 정신적인 양분을 주고, 깨달음을 주고, 쉼을 주는 것이 더 좋다. 사람들과의 부대낌보다 온전한 나를 누리는 시간이 좋다.
2025년 12월 31일까지, 1년 반의 시간을 오롯이 나에게 집중해 볼 생각이다. 그 이후엔 다시 세상으로 나의 시선을 돌릴지, 더욱 깊은 사색과 명상, 묵상의 시간을 가질지는 미지수다. 그저 지금의 이 시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