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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상

손절은 아니고 서서히 멀어지기

by 짱2 2024. 7. 28.

나와 같은 암환우가 있다. 암의 병명은 다르지만 '암'이라는 공통점으로 만나게 된 사람. 현재시점으로 알게 된 지 4년쯤? 가끔 보게 된 지는 2년 반 정도?? 그녀는 나에게 줄기차게 구애를 하는 수컷과 같다. 그리고 나는 그 수컷을 받아들일지 말지 고민하는 암컷의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왜 나에게 그녀의 구애를 받아주지 않느냐고 물어본다면, 그녀와 나의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그녀는 나에게 우리 둘의 결이 같다고 한다. 우리 둘의 공통점이 있긴 하다. 그것을 나는 10개중의 하나라고 보는 거고, 그녀는 10개 중의 9개라고 말한다. 그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난 그녀의 많은 부분이 싫다. 

 

말이 너무 많고, 너무 길다. 짧게 줄여서 말해도 될 것을 너무 길게 말하도 보니 듣는 것도 지루하고, 내가 말할 기회도 짧아진다. 그렇다고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들어줄 만큼 그녀 말의 내용이 깊지도 풍성하지도 않다. 대체로 자기 자랑이다. 내가 그 부분을 지적하니, 이 세상은 자기 자신이 자신을 자랑해야 한다며 그렇지 못한 사람을 어리석다 평한다. 

 

어떤 책을 읽으면서 그 내용이 자신이 생각했던 내용과 같으면 자신도 그런 생각을 했노라 말하면 될것을 자신이 이 글을 썼어야 했는데 이 사람이 먼저 썼다면서 자신의 생각의 깊이를 그 작가의 그것에 묻어가려고 한다. 사람의 인성이나 지혜로움은 자신의 말로 남에게 닿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배어남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그녀의 그것은 어리석은 이의 잘난 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과묵함에서 묻어나는 깊은 철학의 울림을 좋아하는 나에게 그녀의 말의 유희는 가소롭다.

 

사람의 얼굴이나 말에서 느껴지는 빠른 알아차림은 그녀와 나의 공통점중의 하나인데, 이것은 눈치를 많이 보면서 자란 사람의 성격상 발달한 부분이다. 이것은 장점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예민함이기도 하고, 순발력이기도 한데, 잘 활용하면 멋진 사회성으로 진화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마저도 그녀의 대단한 능력으로 치부해 버린다. 아니 자신이 상대방을 이미 다 파악하고 있다는 어리석은 판단을 해버리고 함부로 말한다. 내가 네 머리 꼭대기에 있다는 식으로. 여기까지 만으로 충분히 내가 싫어하는 영역인데, 그녀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말싸움으로 번지면 결코 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내가 너를 이겨야만 한다. 그것이 뭐가 중요할까? 애초에 싸움의 여지를 갖고 싶지 않은 나에게 그런 발화점을 가졌다는 것 자체로 나는 이미 그 사람을 손절하고 싶어 하는 경향의 사람인데, 그 사람은 그것을 해결해야만 한단다. 미칠 노릇이다. 그러고는 구애를 하는 수컷의 모양으로 돌아선다.

 

한 술 더 떠서 암환자가 되면서, 죽음을 앞두고 있어서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면서 이렇게 성장한 자기 자신을 기특해한다. 내가 볼 땐 하나도 바뀌지 않았는데, 오히려 자신을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급으로 올려놓았다는 생각이 들뿐인데... 

 

나를 좋아하고 나와 가까워지고 싶단다. 나와 인생을 이야기하고, 철학을 이야기하고, 삶을 공유하고 싶단다. 이럴수가...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는 거다.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줄 사람을 찾는 거다. 지금 그녀의 말장난 같은 잘난 척도 지겨워서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한다고? NO!!! 난 나만의 시간이 필요한 시기다. 내 심연으로 깊이 들어가서 나를 들여다보고,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이야기를 쓰고, 내가 누구인지, 무얼 원하는지, 어느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 미치도록 고독해지고, 미치도록 사색해야 하는 시기다. 내게 필요하다면 이런 부분을 일깨워줄 멘토 또는 도반이 필요한 거지 수다쟁이 가짜 철학자가 아니다. 그런 이야기라면 차라리 현명한 유튜버의 말 한마디가 더 유익하고, 낮잠 한숨 더 자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좋아하는 배철현 교수의 책을 한 줄이라도 더 읽고, 이렇게 글로 풀어내는 것이 더 현명할 테다. 그녀와 불필요한 수다의 시간을 갖느니 예전 학원 원장님과 모임을 하자고 전화를 하겠다. 남편과 소통을 하겠다. 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겠다. 남자사람친구와 전화통화를 하겠다. 

 

자신이 가진 얄팍한 지식을 전부인양 떠들어 대는것. 가까워진 죽음이 마치 신의 경지에 이른 것인 양 우쭐대는 것. 조용히 있는 것의 위대함을 전혀 넘어서지 못하는 지나친 떠벌림. 

 

사람들은 그녀를 내려놓으라 한다. 시간과 에너지의 소비가 아깝다. 나와 같은 암환우이지만 현재로썬 그녀의 죽음이 나보다 앞선듯하여, 지리적 가까움까지 겹쳐, 그리고 그녀의 구애에 나는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억지로 써왔다. 그런데 어제 그녀와의 시간을 보낸 후, 더 이상 그런 시간이 불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이젠 서서히 그녀를 내려놓을 생각이다. 나에겐 그 누구와의 손절은 없으니까. 그냥 서서히 멀어지기. 아무도 모르게. 

 

쓰다 보니 그녀의 성토대회가 벌어졌지만, 어쩌면 내게 이런 모습이 있기에 내가 더 봐줄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것이든 저것이든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자. 이건 온전히 내 것이다. 내 것을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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