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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상

내가 변했나...

by 짱2 2024. 10. 23.

뮤지컬 시카고 넘버 중에 'all I care about'이라는 곡에서 명품시계, 최고급 시가 따위는 관심 없다고 노래한다. 자기 입으로 '돈'에 관심 없다는 사람은 그 무엇보다 돈에 관심이 많고, '이성'에게 관심 없다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이성에 관심이 있다. 뮤지컬 배우 최재림을 좋아하는데, 그가 부른 'all I care about'의 댓글창엔 그 누구보다 관심 많아 보인다며 얼른 시가를 그에게 주라고하는 재미난 글까지 보여 미소를 짓게 했다. 

 

 

 

 

 

 

지금 내게 이 노래가 생각난 이유는, 요즘 내게 다시 떠오른 화두가 '친구'이기 때문이다. '친구'라는 존재에 대해 연연하지 않기로 했는데, 어쩌면 나는 그 누구보다도 친구에게 관심이 많고, 연연해 하는 사람인 건가 싶다. 물론 예전엔 친구가 무척 중요했던 시절이 있더랬다. 학창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결혼한 후에도 친구들과의 만남은 빼놓을 수 없는 삶의 일부였다. 지금도 주기적으로 만나는 모임, 친구들이 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들이 예전에 내가 느끼던 그런 종류의 친구는 더 이상 아닌 게 되어버렸다. 그 이유라면, 그들이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변한 탓이다. 물론 이 중간과정에서 내가 겪은 '마음절임'의 과정이 있었다. 어찌 쉽게 친구가 놓아졌겠는가. 무척 사랑했고, 마음으로 깊이 아꼈다. 안다. 그 방법은 무척 서툴렀음을. 그리하여 나를 떠나간 친구도 있을 테고, 내가 떠나보낸 친구도 있었으리니... 

 

암환자가 된 이후, 나를 아는 많은 이들이 진심으로 위로해주었다.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아프니까 사람이 보인다'라고 외치며 그들을 평생 잊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이 내게 보여준 행동은 일상의 대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말과 행동이었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들. 동정심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과 내가 다시 동등해졌다. 아니 나는 예전의 나로부터 달라졌다. 죽음의 단계를 뛰어넘으면 안다. 성숙? 변화? 가까워진 죽음이 나를 일깨워준 건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것.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지만 결국 혼자라는 것. 부모님도, 남편도, 자식도 결국은 내가 아닌 것을. 지금 내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 나를 사랑하기에 그들에게도 나의 사랑을 줄 수 있는 것. 이럴진대 하물며 친구는... 

 

친구가 소중하지 않다거나 필요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절실하지 않다. 어쩌다 가끔씩 만나 밥 먹고 이야기 나누면서 좋은 추억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들에게 많은 것, 모든 것을 해줄 수 없는 것처럼 그들도 내게 그런 것들을 해줄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깨닫는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들을 내려놓았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하는 것 같았다. 서운해하는 지인도 있었다. 지금도 나의 '연락 없음'에 서운해할 사람들의 얼굴이 몇몇 떠오른다. 가끔 연락을 할까 하다가...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덧없는 이야기, 아까운 시간... 이 정도의 느낌이라면 굳이 만날 필요가 있을까? 

 

암으로 죽음을 앞둔 지인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지인들과 모두 안좋은 결말로 끝냈다. 나 또한 그녀와 만날 때마다 기분이 몹시 상했다. 그녀는 나를 좋아했지만 그녀의 말투는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기에 충분했고 나는 그것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죽음이 안타까워 그녀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그런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음에도 나는 얼마후면 이 세상을 등질 가엾은 영혼이라 느껴져 품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나도 그녀와 좋지 않은 결말을 맺었다. 그 일이 있었던 그날부터 며칠 동안 나는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내가 뭐라고,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품고 있었을까? 품고 갈 거라면 끝까지 성숙하게 품었어야지, 만날 때마다 말다툼하며 똑같이 어린애들처럼 행동하고 말해놓고 대단한 사람처럼 우쭐댄 꼴이라니. 결국 꼴불견의 결말을 낼 거면서... 참 부끄러웠다.

 

그리고 알았다. 그녀보다 내가 더 못났었다는 것을. 나는 그녀를 나보다 아래로 보았고, 말과 행동으로 하대했다. 친절함을 겉옷으로 입고,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못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도 느꼈을 하대. 내가 뭐라고 사람에 대한 예의를 버렸을까? 그 결과물을 고스란히 받는다. 부끄러움으로. 그녀에게 미안하거나 잘해줄걸 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그녀도 만만치않게 못난 사람이었기에. 다만 내가 성숙하지 못했음을 깨달았고, 앞으로 누구를 만나던지 함부로 대하지 말하야겠다 생각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했거늘, 뾰족한 가시나무를 들고 휘둘렀으니, 매일 책 읽고, 명상하고, 사색한다는 사람이 해서는 안될 몹쓸 짓을 했구나 싶었다. 

 

10년 넘게 보아오는 지인이 있다. 그는 자신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독서'와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통해 자신을 좀 더 나아보이려 노력하는 중이다. 맞다. 그것이 그를 성장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본인 입으로 말했듯 그는 그것을 너무 자랑한다. 자랑이 못남으로 보이는 지점이다. 그가 읽고 있는 고전이 그를 성장시켜 언젠가 그의 입에서 자랑이 사라질 때쯤 그는 진정한 내 친구가 될 거다. 그럼 아직은 아니냐고? 그렇다. 나는 보았다. 내가 암환자가 되었을 때 그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내가 힘들어할 때 그의 입가에 스친 웃음을. 내가 그와 동급으로 되는 것에 기쁨을 느낀 그가 진정한 친구일까? 진정으로 슬퍼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내가 느꼈을 비애. 나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뻐해주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내가 느꼈을 배신감. 물론 그가 완벽하게 배신의 모습으로 나를 대한 것이 아니다. 잠시 스친 그것, 누구나 그 안에 갖고 있는 그것을 밖으로 잠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그것을 보았음이다. 그런 그를 내가 친구로 만나야 하는 걸까? 그의 착함을 보며 오랜 세월 보아왔는데, 문득 그가 나를 보는 이유가 '심심함'은 아닌지. 

 

이토록 까다로운 나의 친구의 '기준'에 누군가는 몸서리를 치며 친구 안하겠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람은 온몸의 감각으로 느낀다. 내가 그를, 그녀를 진심으로 아끼는지, 그가, 그녀가 나를 진심으로 아끼는지. 그러한 기준으로 나의 친구는 세 명이었다. 그중에 내가 가장 아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는 말이 너무 세다. 암환자가 되기 전에는 그녀의 장점이  많아서 그걸 이해하려 애쓰며 만났는데, 언제부턴가 그녀의 강한 말들이 싫어졌다. 그냥 그녀의 스타일이 싫었다. 그걸 견디면서 만나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도 모임에서만 만나기로 했다. 그녀도 느낄 거다. 내가 그녀를 더 이상 예전처럼 아끼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하여 지금 내가 아끼는 친구는 두 명이고, 다른 이들은 지인 정도로 보고 있다. 물론 친구다. 다만 깊이 마음을 주거나 기대하거나 기대를 주지 않는다. 

 

이런 지경이니 내가 친구에게 연연하지 않겠다는 나의 말은 역설이 되는걸까? 아마도 친구라는 대상을 내 안의 것들로 정리하는 단계일 것이다. 손가락에 꼽는 친구가 다시 물러나고 다른 이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도, 어느 누구도 내 친구의 자리에서 빠져나가 없을 수도, 나의 기준이 후해져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게 될 수도 있겠으나, 나이가 들수록 사람에 대한 기대감이 옅어져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 같다. 그리고 그런 만큼 나의 심연으로 깊이 들어가 진정한 고독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내 주변의 친구 다섯이 미래의 내 모습이라고 하는데, 이제 그 친구가 꼭 사람이지만은 않은 것은 나의 변화일까, 세상의 변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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