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가 누군가 "아줌마"라고 부르면 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지칭하는 줄 알 때조차도 절대 그에 응하지 않는 철저한 거부를 고수했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아줌마를 지나 할머니가 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물론 40을 넘겨 50이 되어가면서 이제는 아줌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 오고 있음을, 아니 이미 왔음을 인정해야만 하는구나 인식했다. 워낙 건조한 피부라 웃을 때 눈가의 주름이 잡혔지만, 즐겨 입는 옷차림이 남들에 비해 젊게 입는 편이고, 날씬한 몸 때문에 덕을 좀 보았다. 20대 아가씨로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했지만 가끔은 30대 후반 노처녀로 봐주기도 했으니 참 감사한 날들이었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고, 예쁘고 젊게 보이는 것에 목숨 걸던 나였기에 남들도 한다는 상안검, 하안검 수술을 했다. 친정아버지를 닮아 눈두덩이가 튀어나온 편인 데다 눈꺼풀이 얇아 점점 내려오고 있었다. 눈두덩이 살이 눈을 모두 가리고 있는 친정아버지의 모습에 내 모습이 얹혀져 보이니 빨리 수술을 하는 게 좋다고 결론을 내리고 과감하게 수술했다. 나름 만족하며 살다가 내 나이 만으로 50이 되던 해 덜컥 암환자가 되었다. 그렇게 7년을 지날 무렵, 이젠 몇 년 후 환갑이 되는 나이가 되고 보니 이젠 아무도 나를 아가씨라 부르지 않고, 아줌마라는 호칭은 당연해졌다. 아들을 장가 보냈으니 이젠 인정해야지. 지금도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그건 추태다. 남편은 이젠 할머니가 될 나이라고 하지만 나는 또 할머니 거부권을 행사한다. 아직 손주가 없다는 부연설명과 함께.
작년 봄에 처음으로 20회에 걸친 피부관리에 큰 돈을 투자했다. 필러도 맞았다. 피부의 결은 고와진 거 같지만 있었던 잡티가 없어진 것과 더불어 없던 잡티가 생기는 희한한 경험을 하고, 필러가 단단해져 녹이는 주사를 맞았더니 그 자리가 푹 꺼지는 어이없는 경험까지 따따블로 얹혀졌다. 속상함을 어찌해야 할지. 피 같은 내 돈을 어쩔까. 하지 않은 것만 못한 건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눈꺼풀은 또 쳐지고, 눈밑 주름은 차마 웃음을 웃을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아마도 암수술 후의 후유증으로 매일 겪는 고통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빨리 늙는 거 같아 너무 속상해서 나에게 주는 선물로 쌍꺼풀수술에 또 도전했다. 마침 예전에 수술했던 곳에서 정말 싸게 수술할 수 있었다. 수술대에 누워 눈 주위에 마취 주사를 맞는데 아뿔싸! 정말 후회가 막심했다. 이렇게 아픈걸 왜 내가 수술할 생각을 했을까? 이번이 마지막이다(또 모르지. 몇 년이 흐르면 잊어버리고 보이는 주름살에 다시 수술을 생각할지). 앞으로 절대 수술은 안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눈 주위에 시퍼러둥둥 멍이 들고, 차마 남편에게 얼굴 보여주기 민망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당당하게 행동했다. '내돈내산'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남편 돈으로 했으면 참 미안했을 거 같다. 그런데 사실 내 돈 네 돈이 뭐 있냐마는.)
이런 지경이니 이제 나의 아줌마 시절은 오래전에 시작된거다. 유튜브에서 노후를 위한 10가지, 노후의 경제 등등이 나오면 꼼꼼히 보게 되고,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들도 이젠 절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중년, 노년 관련 책도 찾아 읽게 된다. 그러다 만나게 된 78세 할머니(25년 현재 한국 나이) 이 옥선님 쓰신 「즐거운 어른」은 유쾌한 울림을 주었다. 48년생이니 나의 엄마보다 두 살 어리다. 그 당시에 대학에서 국사를 전공하고 선생님으로 근무하셨으니 나의 엄마와는 조금 다른 삶을 사셨으리라. 그랬기에 이렇게 유쾌한 할머니가 되어 즐거운 글을 쓰실 수 있었으리라. 아마 지금 내 나이의 아줌마, 아저씨들은 이 분처럼 유쾌하게 이 삶을 즐길 줄 아는 노인이 될 거라 생각한다. 고생하며 살았고 배움도 짧았던 그 시절과 달리 대체로 좋은 교육을 받았고, 열심히 살았고, 경제력도 어느 정도 되고, 새로운 기술과 문화도 받아들일 줄 아니 말이다. 아무튼 나보다 윗세대인 어른이 유쾌하게 풀어낸 책은 쉽게 읽혔고, 나도 나이 들면 어때야 하리라는 그림이 그려진 밝은 책이어서 좋았다.
이제까지 대충 즐겁게 잘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너희도 너무 애쓰지 말고 대충(이것이 중요하다) 살고, 쾌락을 좇는다고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뭔가 불편한 것이 있으면 이것부터 해결하는 방법으로 살면 소소하게 행복할 것이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건강을 잃으면 행복하기 어렵다) 한 종목의 운동을 늙어서까지 꾸준히 할 것이며 너무 복잡한 건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살도록 해라.
내 나이가 아직 환갑은 안되었지만 크게 잘라본다면 결혼 전의 3분의 1과 결혼 후의 3분의 2로 나눌수 있겠다. 앞의 3분의 1은 어려서 기억에 없는 부분이 거의 절반이겠지만, 기억에 남는 절반 중에 나머지 반은 철이 없어 생각 없이 지냈고, 그 나머지는 행복한 날과 행복하지 않았던 날이 또 절반씩이지 않을까 싶다. 가난과 부모님의 잦은 싸움으로 참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고, 그럼에도 엄마의 사랑과 또 아이러니하게도 아빠의 사랑과 친구들과 추억들로 무지갯빛으로 물든 날들도 많다. 아마도 반의 반의 반의 반쯤 되는 찬란한 날들이 내 어릴 적을 버텨주는 건 아닌지. 내가 긍정적이었는지, 엄마의 사랑 덕분이었는지, 아님 나의 철없음이 반전을 가져온 건지 모를 일이다.
다행인 것은, 정말 참 다행인 것은 그 당시에 믿지도 않았던 하느님께서 내게 보석 같은 남편을 보내주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생각난 건데,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아니면 아가씨 때부터? 막연히 천주교에 경외감을 갖고 있었다. 언젠가 종교를 가지면 그건 천주교일 거라 늘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하느님은 이미 아셨을까? 당신의 자녀가 될 줄을. 그래서 미리 선물을 보내셨나 보다. 아무튼 선물처럼 내게 온 남편을 만난 이후로 내 삶은 변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보물인 아들을 낳았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물론 지금은 또 성당에 안 나가지만, 난 늘 성당에 마음을 두고 있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계속하고 있고, 가난에서도 벗어났고, 매일이 즐겁고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리하여 이옥선 작가처럼 나 또한 이제까지 즐겁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충'이 아니라 정말 즐겁게 살아왔다. 쾌락을 좇아도 보았고, 그래서 그 끝이 결코 행복이 아님도 몸소 알았다. 다만 내 성격상 '대충' 살지를 못해 매일 '갓생' 살듯이 살아내느라 또 혼자 치열하다. 하지만 이것도 나의 즐거움이니 뭐... 다만 쾌락을 좇는 삶을 산 덕분에 건강을 잃었으니 이게 참 안타까운 일인데 또 아이러니하게 덕분에 그때 이후로 건강한 삶을 살기위해 좀 더 노력하고 있다. 다만, 아직은 운동이 젤 하기 힘든 일이라 많이 부족하니 이건 정말 더 노력해야 한다.
또 다른 친구는.... 여기저기 몸이 아프고 해서 굳이 오래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한다. 나는 "아니야 , 나는 좀더 오래 살고 싶어. 내가 두고 보아야 할 사안이나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그것들을 다 구경하고 싶어. 그러니 좀 더 오래 살기 위해서 건강에 힘을 쏟아야겠다"라고 말해주었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울림을 받은 부분이다. 두고 보아야 할 사안이나 인물이라니... 이처럼 호기심 넘치고 열정적일수가. 이런 마인드를 갖고 있으니 이렇게 즐거운 책을 썼겠구나 싶었다. 나도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었는데, 약간 주책이 없고, 오지랖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굴러갈 거고, 또 늙어서 그걸 알아 뭐 할 건가. 그냥 얼렁 이 세상 떠나도 괜찮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했었다. 물론 내가 육체적 통증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 암경험자라는 것이 이런 생각을 더 부추기기도 했겠지만. 그런데 용기를 내본다. 앞으로 알고 싶은 것들도 참 많다고. 앞으로 보고 싶은 것들도 참 많다고.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것도 참 많다고. 그런 것들을 모두 해보고 싶다고. 하나씩 하나씩 해보고 느끼면서 죽는 날까지 호기심 천국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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