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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사이

나는 품위 있게 죽고 싶다 - 윤 영호 -

by 짱2 2025. 3. 7.

우리는 누구나 품위 있게 죽고 싶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죽음과 관련한 의료제도와 법률 그리고 죽음에 대한 철학에는 한계가 많다. 내가 아무리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부르짖어도, 의식을 잃어 병원에 실려가는 순간 원치 않는 생명연장의 시작이 펼쳐지고,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 

 

사람들은 병원에만 가면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의사들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듯, 의사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순간에는 존엄하게 보내줄 수 있어야 한다. 환자와 가족들이 고통스럽지 않게,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 세상이 정말 달라지기를 바란다. 이 문제는 바로 나의 문제이기에 나는 참 간절하다. 

 

 

 

 

질병과 죽음을 삶의 적으로만 규정하고 더 오래 살려는 방법에만 집착하느라,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부정한 채 생명 연장에만 골몰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죽을 때까지' 치료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죽음을 준비하고 삶을 완성할 시간은 사라진다. 

 

죽을 때까지 치료... 얼마나 무식하고 어이없는 일인가! 그런데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이것이 가족들의 최선이라고 여긴다는 것. 환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환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상관없이 의사와 가족들이 최선을 다해 환자를 고통으로 몰아간다. 나는 이런 상황이 너무 싫어서 남편과 아들에게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응급상황이 되었을 때 과연 그들이 침착하게 대처해 줄지 의문이고, 나 또한 나의 부모님이나 남편의 경우에 차분하게 대처할지 자신할 수 없다. 확실한 지식도 없고, 그저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일 뿐이라 자신감이 떨어진다. 당장 부모님이 아프시면 어찌해야 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존엄사와 소극적 안락사를 구분하지 못해서 생기는 오해도 있다. 지금도 일부 언론이 이를 정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혼용해 사용한다. 존엄사와 소극적 안락사는 명확히 다르다. 소극적 안락사란 임종이 임박하지 않은 환자의 요청에 따라 생명 유지에 필요한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자연적인 죽음 이전에 사망케 하는 행위다. 반면 존엄사란 말기 환자의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앞두고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생명 연장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자연적인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소극적인 안락사는 생명을 단축하지만, 존엄사는 죽음을 앞당기는 아니다. 임종이 임박했는지 아닌지로 구분하면 이해가 쉽다. 우리나라 등 대부분의 국가가 허용하는 것도 존엄사이지 소극적 안락사가 아니다

 

결국 정부는 호스피스 장려가 아니라 규제 정책을 실시하고 있는 셈이다. 환자들에게 호스피스를 설명하지 않고 선택 기회를 주지 않는 의사와 병원은 비윤리적이다. 환자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며, 의사의 선행 원칙에도 어긋난다. 규제해야 할 것은 치료 효과도 없이 처방되는 항암 치료와 면역요법, 연명의료다.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에서조차 끝까지 항암 치료를 시행해 오히려 죽음을 앞당기거나,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면역요법으로 죽음을 준비할 기회를 빼앗는 의료기관과 의료진은 규제해야 한다. 

 

저자는 존엄사를 적극 지지하며 정책적으로 호스피스를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미없는 연명치료로 죽음의 준비 기회조차 빼앗는 현재의 의료제도를 비난한다.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가족의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견디다 못해 살인까지 행하는 패륜마저 일어날 정도인데 이것이 과연 그들만의 문제일까? 나의 부모님의 문제일 수도, 나의 문제일 수도 있다. 방관만 할 때가 아니다. 

 

 

 

빈부격차나 사회적 지위를 떠나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삶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시간을 확보해줘야 한다. 생활하던 집 또는 편안하고 분위기를 갖춘 공간에서 의료진이 지속적인 돌봄을 제공해 통증을 관리하고, 먼길 떠나기 전 가족 및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삶을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해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승화할 수 있게 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죽음을 터부시 하는 문화가 아닌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웰다잉 문화로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국민 모두 일생에 단 한 번 이용할 수 있는 제도다.

 

아~ 이런 제도가 생긴다면, 내 부모님의 죽음도, 나의 죽음도 얼마나 안심이 되고 편안한 모습일까? 모든 국민이 일생에 단 한 번 이용할 수 있는 제도이니 또 얼마나 공평한가! 그러나 현실은 멀었다. 저자는 말한다. 20년 동안 이것에 대해 말한 대통령은 한 명도 없었다고. 단지 몇 가지만 법안으로 제정되고 모든것이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아마 의료계가 제일 곤란 해할 테니... 이 부분은 전문가들이 나서서 해줘야 할 것이고, 우리도 그에 발맞춰 호응하고 힘을 실어줘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제 많은 386세대가 노령기로 접어들면서 먼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현실이기에 많이 공감하고 추진될 거라 예상하고, 꼭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저자는 여러 사례를 들기도 하고, 대안적 방안도 몇 가지 내놓았지만 쉽게 이루어질 것들도 아니고, 내가 직접적으로 접근할 범위의 것이 아니기에 가볍게 읽으며 넘겼다. 다만 죽음에 대한 저자의 시선과 태도를 공감하며 나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한 번 더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누구나 마지막까지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떠나야 한다면 의미 있는 죽음이기를 원한다. 다음 세대의 더 나은 삶에 기여하면서 기꺼이 자리를 비워주는 것, 그래서 우리 삶의 연속성을 그들에게 맡기는 것이다. 지금의 삶이 끝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존재한다는 믿음과 사랑을 가진 채 세상을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죽음이다. 

 

저자는 어머니와 형제들의 죽음을 겪으며 비록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났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사랑으로 간직된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죽음이 끝이 아님을 생각하는듯 하다. 나의 경우는 죽음은 끝이라고 믿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 간직된 것은 그저 단순한 무형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어머니가 자신과 늘 함께하기에 죽음이 결코 끝이라는 신념을 갖게 된 거 같다. 그렇다면 나는 사랑하는 내 아들에게 이어지는 아름다운 죽음을 죽어야겠구나. 나를 떠올리며 사랑했었고, 고마웠었고, 행복했었다고, 그리고 그런 엄마의 사랑으로 계속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노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은퇴 후의 삶을 준비하는 것을 '인생 이모작'이라고 부르듯이, 죽음을 준비하고 베풀기 위한 '인생 삼모작'을 준비해보자.

'버킷리스트'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이라면, 내가 남길 정신적 유산을 정리하는 '레거시리스트(legacy list)'도 필요하다. 인생을 잘 마무리하고 살아온 삶에 의미를 부여해 남은 사람들에게 인생에 대한 용기와 사랑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자신만의 고유한 전설을 남기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이다.

 

'레거시리스트'라는 멋진 용어를 배웠다. 그저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만 욕심내기보다는 내가 남길 정신적 유산은 뭐가 있을지 고민하고, 잘 마무리해야 할 텐데... 나 한 사람 잘 사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후손들이, 이 대한민국의 자손들이 좀 더 잘 살 수 있도록 내가 조그만 도움이라도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 글을 쓰면서 퍼뜩 한 생각이 들었다. 시선을 멀리 두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내 주변부터 돌아보는 것이 더 유익하고 현명하리라는. 부모님이 아프시면 어찌할까 고민이 되었는데, 밖으로 향한 불우이웃 돕기 이전에, 내 부모님의 노후를 잘 보살펴 드리고, 잘 보내드리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일테고,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들을 토대로 다른 어르신들에게 도움을 줄수도 있을 테고, 나 또한 죽음을 준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막연하고 먼 곳이 아니라 바로 나와 가장 가까운 부모님과 가족들과의 사랑 가득한 삶이 이어지고 이어져 이웃으로, 국가로 퍼져나갈 수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하니 부모님의 노후를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막막했던 부분도 풀어지는 느낌이 든다. 물론 이렇게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현실로 이어지는 것의 차이는 있으리라. 그러나 내게 주어지는 문제들을 그때그때 잘 해결해 나가면 끝내는 좋은 방향으로 맺어져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 과정은 모두 나의 배움으로 이어져 언제, 어디에서 베풂으로 이어질 거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되어야만 한다. 나의 노후는... 그래서 늘 공부를 생각하고, 성장을 생각하고, 성당을 잊지 않고 있다. 

 

성당도 나에겐 화두이다. 지금 당장이어야 하는데... 마찬가지로 영어도 그렇다. 지금 당장이어야 한다. 그러나 나의 쓸데없는 자존심이 좀 더 성장한 나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 성장의 끝을 무한대로 두지 않음이 다행이다. 나는 그 한계의 끝을 28년으로 정해두었다. 그렇기에 지금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그 모습이 되어야 하니까. 환갑이 된 내가 풀어가는 노후의 모습이 정말 기대된다. 그래서 지금이 더 행복하다. 그래서 나의 노후가 두렵지 않다. 

 

 

 

 

처음과 중간은 잘 모르더라도 마지막에 죽음으로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삶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삶을 해석하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가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이 있다. 저자는 '처음과 중간은 잘 모르더라도...'라고 표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과 중간도 잘 알고 있고, 나의 마지막도 알 거 같다. 처음과 중간을 잘 아는 이유는 꾸준히 글을 써왔고, 꾸준히 나를 사색했고, 공부했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초등학생부터였고, 그 과정에서 그보다 더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부끄러운 내 모습까지 다 내 것으로 보듬어 안고 있다. 그저 부끄러워 머리를 처박고 싶은 적이 있어서 안타까울 뿐. 나는 나를 안다. 글쓰기와 더불어 또 하나, 나를 잘 알게 된 계기는 성당이다. 나에게 성당은 단순히 종교가 아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의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나를 진심으로 사색하게 해 준 발판이고 징검다리였다. 그런 삶을 60년 가까이 살아왔으니 나의 미래도 보이지 않겠는가! 부유한 삶은 아니어도 최소한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는 알겠고, 그렇게 살아낼 용기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살기 위해 지금을 살아내고 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다.

 

사회적인 제도는 시급하다. 깨어있는 의사들과 관련된 분들이 어서 빨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 국민 모두가 죽음을 두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빠르면 내 부모님 세대부터 아니면 나의 세대부터라도 그도 아니면 내 자손들이라도 그런 복지를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 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면 된다. 즐겁게 살고, 건강하게 살고, 내 주변을 돌보면서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