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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상

남편이 늦으면

by 짱2 2021. 10. 2.

자전거 타면서 영어문장을 암기하는데, 아마도 공부를 하는 탓에 자꾸 다른 생각이 떠오르는가 보다. 오늘은 문득 남편이 갑자기 늦는다고 하면 나는 뭘 하고 있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았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누군가를 만나러 나가야겠다는 것. 혼자 집에 있으면 외로울 거 같고, 혼자 저녁밥 먹는 것도 싫으니, 친구를 만나 수다 떨며 시간을 보내고 들어오면, 술 취한 남편은 집에 들어와 대자로 누워 자고 있을테고, 그 모습을 보고 안심하며 나도 씻고 잘 준비를 하겠지. 그럼 누구를 만날까? 라임언니는 너무 멀리 살고, 경미는 늦게 퇴근하니 출근 안 하는 날과 맞아떨어져야 하고 등등... 대모님뿐이네. 그런데 누군가를 만나면 에너지도 소모되고, 조금 귀찮기도 하고, 내가 먼저 만나자고 연락하니 백수가 된 입장에서 부담도 되고...

 

그런 생각이 들면서 왜 꼭 누군가를 만나려고만 할까... 싶었다. 나의 외로움은 늘 누군가로 채우려고 했던 것에서 문제를 발생시켰고, 내가 암환자가 된 원인도 거기에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다시 돌이켜본다. 친구를 좋아해서 자주 늦게 들어오던 남편을 조금은 탓해본다. 남편이 조금 더 집에 충실했고, 술을 조금만 덜 마셨더라도, 고운말로 나를 달래주기만 했더라도 나는 외로움을 덜 느꼈을 것이고, 알콜중독이 되지 않았을 테고, 다른 것들도 채우려고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그 외로움을 술로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 채우려고 했던 것은 나의 탓이란 걸 안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암환자가 된 것에 남편의 역할이 어느 정도 있고, 또 암환자가 된 지금 내가 가장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또 남편이란 사실이다. 어느 쪽이던지 나에게 남편은 참 큰 부분인 것만은 틀림없구나. 

 

아무튼,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시간과 에너지와 비용을 발생시키니, 조금은 귀찮은 생각도 들고, 내가 필요한 순간에 그들이 있어줄 거라는 보장도 없으니 난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아! 영화를 보러 된다. 난 반액으로 영화를 볼 수 있고, 영화관도 가까운 곳에 있으니 언제든지 보러 갈 수 있다. 한 시간 정도 소요되는 반신욕을 해도 좋겠다. 뜨끈하게 반신욕 하고, 개운하게 샤워하고 나면 잠도 잘 오고, 건강에도 좋으니 얼마나 좋은가! 산책해도 좋지. 우리집 앞이 바로 산책로인데, 한두 시간 걸으며 음악을 들어도 좋고, 유튜브를 들어도(난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다) 좋겠다. 독서도 있네. 읽어야 할 책이 쌓여 있는데, 그 책들을 읽어도 되고, 공부할 것도 얼마나 많은데. 

 

세상에나. 이렇게나 할 것들이 수두룩 빽빽인데, 누굴 만날까부터 생각하다니. 외로울 거라 미리부터 생각해버리다니. 남편이 늦는 것에 아직도 예민하다니. 이제 남편도 예전처럼 자주 마시지도 않고, 마시더라도 집에 일찍 들어오는데, 왜 아직도 예민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자꾸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에도 익숙해지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혼자 있어도 우울해하지 않고, 더 건강하게, 더 멋지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만들어가야 한다. 

 

암환자인 내가 얼마나 더 살지 나는 알지 못한다. 1년을 더 살지, 10년을 더 살지, 30년을 더 살지... 남편이 나보다 먼저 갈지, 내가 남편보다 먼저 갈지... 내가 부모님보다 먼저 갈지, 부모님이 나보다 먼저 가실지... 죽음이 멀게만 느껴졌었는데, 암환자가 된 이후엔 죽음과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것이 싫지만은 않다. 사람들은 언젠가 죽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고 인생을 허투루 보내고, 아쉬움을 남긴다. 암환자가 된 나는 죽음을 받아들였고, 후회 없이 살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다. 얼마나 더 살지 모르기에. 남편이 언제 들어올까 노심초사하며 보내야 할 만큼 가치 없는 삶이 아니다. 햇빛 한 줄기도 가슴으로 끌어안는 삶을 살거다. 소중하고 복된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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