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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책 읽기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원저 : 애덤 스미스, 저자 : 러셀 로버츠

by 짱2 2024. 9. 27.

애덤 스미스는 옷걸이에서 내 코트를 집어 들더니, 그 사이 보송하게 마른 것을 보고 흡족해했다. 그는 내가 코트 입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그리고 자애롭고 예의 바른 사람답게 문까지 나를 배웅해 주었다. 문간에서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가 준 모든 것이 고마웠다. 그의 생각과 영감을 듣고 그의 통찰력이 고스란히 인쇄된 책을 읽으며 함께 한 모든 시간이 감사했다. 그이 집에서 나오니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었다. 비는 그쳤고, 옅은 안개가 대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한기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때 스미스가 내 옆으로 다가왔고 우리는 서로에게 따뜻한 작별 인사를 건넸다.

문이 닫히고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촛불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위층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깜박이는 불빛이 보였다. 아마도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잠깐 책을 읽을지도 모른다. 그가 있을 방의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내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어준 그의 통찰력을 생각하며 불이 꺼지길 기다렸다. 드디어 불빛이 꺼지면서 그의 방이 어두워졌다. 

어두워진 방을 향해 나는 "안녕히 주무세요. 친구여."라고 작게 말했다. 그리고 옷깃을 세우고 집으로 향했다.

 

 

 

저자인 러셀 로버츠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일상의 언어로 훌륭하게 재탄생시켰다는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국부론'과 같은 감히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책의 저자인 애덤 스미스의 또 다른 책 '도덕감정론'을  그만의 멋진 언어로 풀어냈다. 위의 문장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인데, 애덤 스미스와 깊은 대화를 나눈 후, 그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선 모습으로 그려낸다. 마치 소설을 읽은 듯한 느낌으로 마무리하는 저자의 필력에, 멋짐에 반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긴 글 속에서 연극무대 같은 마지막의 이 부분에 전율을 느꼈으니 나도 참 특이한 감성을 지닌 모양이다.

 

저자는 애덤 스미스의 책을 단순히 읽은 것이 아니라 그와 오래도록 대화를 나누며 그의 철학을, 그의 사상을 온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렇게 대화를 마친 제자와도 같고, 벗과도 같은 이를 배웅한 후 잠들 준비를 하는 그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는 경외심까지 고스란히 느껴져 비 그친 후의 밤 정경이 눈에 선할 정도다.  얼마나 멋진가! 오래전 쓰인 책에서 스승을 찾고, 멘토를 찾고, 벗을 느끼고, 자신의 철학을 발견하고, 세상에 대한 통찰을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것이. 아마도 이런 저자의 마음이 읽혀 앞 페이지의 모든 내용을 뒤로하고 이 부분이 가장 좋았나 보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라'라는 말이 있다. 나보다 먼저 큰 깨달음을 얻고 그것을 글로 써낸 훌륭한 철학자, 저자들의 어깨에 올라타야 한다. 그들의 깨달음을, 그들의 언어를 쉽게 내 것으로 흡수하기 어려워 손에 들었던 책을 내려놓기도 했다. 막상 읽은 후에도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어 오히려 자신의 무지를, 무식을 자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깊이깊이 이해하며 몇 번이고 읽으면서 내 것으로 만든다면 저자처럼 '대화한 듯' 작별인사를 나누며 옷깃을 여미고 뒤돌아 나의 길로 향하지 않을까? 

 

요즘 서서히 고전 읽기에 다시  도전할 시동을 걸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의 풀어쓴 해설서가 아닌 거인이 직접 쓴 글을 고스란히 읽어내며 그야말로 행간의 의미를 나만의 언어로 풀어내고, 내 삶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찾아갈 생각이다. 올해와 내년까지는 영어공부에 몰입하는 시간이고, 아직 읽어야 할 다른 책들이 있어서 신중하게 한 권을 선택하고 천천히 읽어갈 생각이다. 애덤 스미스의 책은 언제쯤 직접 읽을 수 있을까? 아직은 이렇게 다른 저자의 언어를 통해 읽는다.

 

 

 

 

인간 본연의 강한 자기애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시키고 사심 없이 행동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한 가지 답을 한다면, 우리가 친절하고 품위 있는 존재로 타고났기 때문이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할 뿐 아니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내가 사랑받고 있고, 또한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행복할까? 반대로 내가 미움받고 있고, 미움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불행할까?

 

이 세 줄이 이 책의 핵심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왜 선을 베풀고 남이 보지 않아도 바르게 사는 것이 옳다고 믿으며 질서를 지키고 고운 마음을 유지할까? 그건 스스로가 사랑스러운 사람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나라는 사람이 마땅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그래서 사랑받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정말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나 스스로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데 누군가 나를 사랑해 주면 불안하다. '나의 못남이 들통나면?'이라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 이전에 나 스스의 인정욕구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친절하고 품위 있는 존재이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고 나와 함께 하고자 인연의 끈을 이어간다. 나 또한 그런 그들이 친절하고 품위 있는 존재라 믿기에 내 사랑을 그들에게 준다. 내가 주는 나의 사랑이 아깝지 않다. 오히려 당연하다. 

 

 

 

공정한 관찰자란 인간의 상상 속 인물로,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은 이 공정한 관찰자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 공정한 관찰자는 우리와 대화를 나누며 우리의 행동이 도덕적인지 확인해 주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인물이다. 즉, 어떤 행동이 도덕적인지, 어떤 행동이 옳은지 판단해야 할 때 우리는 이 인물과 얘기를 나눈다.

 

사람들은 타인의 반응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공정한 관찰자를 상상하게 된다. 

공정한 관찰자를 상상하면, '실제로 바르게 행동했는가'와는 별도로 이를 통해 강력한 자기 수양을 할 수 있다. 공정한 관찰자를 상상하면, 나 자신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다. 이는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피하거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용감한 행동이다. 

그러나 이를 피하지 않고 잘 해낼 수 있다면, 즉 한 걸음 물러서서 자신을 지켜볼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어떻게 하면 점점 나아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결점과 습관을 잊고 평생을 방랑하듯 사는 대신, 마음 챙김을 하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다.

 

'사랑스러운 사람인 나'는 어떻게 '선'을 판단하고 '정의'를 판단할까? 어떻게 '바르게 행동할까?' 무엇을 기준으로. 그건 객관적 인물인 '공정한 관찰자'가 있어서 타인의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공정한 심판을 하게 되고, 우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성선설, 성악설의 주장을 보면 둘 다 맞는 말 같다. 천진무구한 아기를 보면 도대체 성악설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나도 모르는 내 안의 그 무엇이 때로는 '악'일 경우를 아주 가끔 느낄 때가 있다. 그런데 나는 왜 그것을 행하지는 않을까? 그저 남의 눈이 무섭고, 감옥에 가고, 신께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그런데 이것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다. 뭔가 강렬한 이끌림으로 그 선을 넘어가지 않는 나를 설명할 수 없던 그것. 그건 바로 내 안의 '공정한 관찰자'였다. 시간과 관계를 통해 배우고 성장한 관찰자는 내가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도록, 그리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도록 계속 담금질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려운 행간을 내가 얼마나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두 가지! '사랑스러운 사람'과 '공정한 관찰자'는 오래도록, 어쩌면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단어가 될 것 같다.  사회에서 '나'란 사람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이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도록  내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화두를 던져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