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독서시간에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을 읽다가 자주 보던 유튜버의 같이 독서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바람에 '쇼펜하우어의 아포리즘'이라는 책으로 급히 넘어가게 되었다. 얼마 전부터 유행의 바람을 일으키는 쇼펜하우어를 나는 참 오래전에 읽었더랬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쇼펜하우어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책의 지면이 세월을 따라 연한 미색으로 변해갈 즈음, 다시 읽으니 제법 눈에 들어오던 즈음, 세상은 쇼펜하우어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밀리의 서재로 유행하는 책을 읽으면서, 쇼펜하우어의 글은 참 좋으나 그것을 풀어놓은 저자의 글은 '참 세속적이구나! 그저 남들이 하는 말잔치구나!' 싶었다. 저자는 여러 영상에 나와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그의 말 또한 그 이상을 넘지는 못했다.
물론 나에게 '그럼 너는 저자만큼 글을 쓸 수 있어서 그렇게 잘난척이냐?'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No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작가가 아니다. 독자다. 독자의 입장에서 내가 그렇게 느낀다는데 어쩔 것이냐!
그러다 만난 '쇼펜하우어의 아포리즘'은 예전에 읽던 쇼펜하우어의 책보다 좋았다. 이 책도 제법 어렵지만 예전에 읽었던 쇼펜하우어는 더 어려웠다. 다시 한번 읽을 책으로 내 책상의 손이 닿는 책꽂이에 꽂혀 있다. '쇼펜하우어의 아포리즘'은 두 번째 읽으며 떠오르는 것들을 글로도 풀어냈었다. 그리고 다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철현 교수의 책으로 돌아왔다. 이 책의 시리즈 네 권은 평생 곁에 두고 읽을 내 인생책이다. 지금 이 글은 심연 11이지만 이것이 111이 될 수도 있고 1111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머지 세 권, 정적, 수련, 승화까지 이렇게 반복될 수도 있다. 배철현 교수의 성찰을 내 평생의 철학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내 삶은 풍성해질 거라 믿는다. 매일 철학의 늪에 빠져 살 수 있을 거 같다.
우리가 진정으로 응시해야 하는 것은 외부 세계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응시의 목적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담담한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시선이 아닌 새롭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책의 제목처럼 '심연'으로 들어가라는 말이다.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은 외부가 아닌 내 안의 나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선은 새롭고 객관적으로 그리고 담담해야 한다. 나에게 이런 시선이 가능하다면 좋으련만, 아직 나의 내공이 그러하지 못하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현실의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 수준이다. 그러다 차분해진 어느 날 저녁 나를 잠시 객관적으로 본다. 낮에 내가 했던 말, 남에게 보여주려 했던 행동들에 대한 깨달음이 몰려오면 쥐구멍을 찾고 싶다. 한 단계 올라선듯 성장의 뿌듯함을 느꼈던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다시 어리석음을 세상에 흘리고 있었으니...
우리는 대부분 이 오래된 자아를 벗어버리기보다 그것을 붙잡아 강화시키려 한다. 배움은 이 오래된 자아인 '첫 번째 나'로부터 탈출하는 과감하고 용기 있는 과정이어야 한다. 자아를 치장하고 강화하는 교육은 재미없는 세상을 만들어 낼 뿐이다.
과감하고 용기 있는 과정에 있음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오래된 자아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그것을 붙잡아 강화하고 싶지 않다. 그것을 뿌리뽑고 싶다. 그런데 이미 익숙해진 오래된 자아가 아직도 내게 머물러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 미칠 듯이 싫다.
햇빛은 누구에게나 쏟아지지만 그것을 통해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경우는 슈퍼맨과 같은 영웅말고는 흔치 않다. 슈퍼맨처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간은 얼마든지 영웅이 될 수 있다.
그렇겠지.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을만큼 쉽다면 영웅이라 불리지도 않겠지.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얼마만큼의 고통이 따라야 하는 것일까? 배철현 교수는 삶의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멘토를 만났다. 내가 그토록 원하는 멘토를... 그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찾아갔고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영혼을 울리는 신의 소리와도 같은 멘토의 말을 듣는다.
"Show yourself!"
아마 저자는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과 '최선'을 다했으리라. 그에겐 변하고 싶은 용기가 있었을 테니.
멘토와의 만남이 있은 뒤 나의 하루하루는 이전과 전혀 다른 나를 찾는 수행으로 채워졌다. 그것은 힘들지만 감동적인 일이었다. 내 영혼을 울린 멘토의 목소리는 지금도 여전히 나를 깨운다. 그리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할 용기를 갖게 한다.
그는 참 행복하겠다. 지금도 여전히 자신을 깨울 멘토를 만났으니. 내가 그토록 원하는 나의 멘토는 언제쯤 나에게 찾아와 줄까? 지금은 그 대상을 배철현 교수님과 같은 분들의 책으로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간이 지나면 분명 멘토를 만날 것이라 믿는다. 그 시기를 내가 환갑이 되는 즈음으로 생각하고 있다.
저자는 변하고 싶었고, 용기를 내었다. 멘토를 향해 손을 뻗었고, 영혼까지 울리는 수행의 과정을 통해 성장했으리라. 고통 없는 성장은 없다.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껍질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몸으로 탈바꿈하는 힘겨운 싸움을 치르는 갑각류처럼 스스로의 깨우침과 과정의 고난은 필요조건이다.
나에겐 변하고자 하는 용기는 있다고 말하려니 고통의 과정을 두려워하는 내가 보이고, 그것은 결국 진정한 용기가 있다고 말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것을 깰 수 있는 멘토를 만나는 날을 고대한다고 말하려니 그것은 또 결국 또 다른 회피임을 스스로 인정한다. 성장도, 멘토의 출현도 결국 나의 부단하고 지난한 과정에서 이루어질 터이니 저자가 말하듯이 자아를 치장하고 강화하는 교육이 아닌, 진정한 성장을 위한 교육의 시간이 오래 필요하리라. 지금은 그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