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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 수련, 정적, 승화

정적 1 - 프롤로그

by 짱2 2025. 4. 10.

배철현 교수의 심연, 수련을 거쳐 이제 세 번째 책인 정적까지 왔다. 두 권의 책을 재독 하며 이렇게 글로 옮겨 적고, 나의 생각까지 덧붙이는 과정을 거쳤음에도 내 머릿속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느낌은 뭘까? 이것은 이 책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모든 책 읽기, 나의 모든 공부가 그러하다. 나의 아이큐가 100은 훌쩍 뛰어넘는데, 머리가 나쁜 탓은 아닐 테고, 깊은 깨달음의 과정의 부족일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나의 지적, 심적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요즘 내게 떠오른 화두중의 하나는 '필사'이다. 그런데 필사하는 시간이 너무 아깝고 부질없다는 생각과 교차하면서 과연 이것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유튜버가 하는 말이 가슴에 와서 콕 박혔다. "한 문장씩 외운 후 필사해라. 틀린 부분이 있으면 다른 색으로 다시 써라." 아! 모든 것은 이것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저 눈으로 읽고, 손으로 쓰는 필사는 내가 생각한 대로 아무 의미 없이 시간만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내 것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난 그 부분을 알지 못했었고, 어느 유튜브가 나를 일깨운 것이다.

 

오늘, 새벽에 눈이 떠졌고, 기분 좋게 하루를 일찍 시작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영어필사를 하는데, 그저 눈으로 읽고, 손으로 쓰는 필사가 아닌, 비록 암기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문장, 또는 한 단락씩 끊어가며 머릿속에 그리고, 입으로 말하면서 노트에 적어보았다. 오늘 필사한 부분들이 좀 쉬웠던 것인지, 아니면 나의 이런 변화 때문인지, 필사를 마친 후, 리스닝을 하는데 참 잘 들렸다. 이것인가 보다!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 나는 이것을 놓치고 있었나 보다. 

 

이제 배철현 교수의 세 번째 책 '정적'을 쓰는 이 과정은, 이전처럼 그저 눈과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하면서 머릿속에, 마음속에 새기면서 옮겨 적어보려 한다. 그리고 네 번째 책 '승화'까지 모두 끝낸 후엔 정말 노트에 필사할 생각이다. 이 생각은 벌써 며칠 전부터 하고 있었다.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했거니와 이 좋은 글을 쓰는 시간이 참 행복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만으로도 벌써부터 설레는 것을 보니 나는 도전, 성장, 의미, 행복이라는 화두에 참 절실하구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배철현 교수의 이 네 권의 책은 나와 결을 같이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들을 선택했고, 구입했고, 재독 하고, 글쓰기까지 하고 있으리라. 

 

 

 

 

'정적'은 잠잠한 호수와도 같은 마음의 상태다. 잡념으로 인해 흔들리는 마음의 소용돌이를 잠재우고 고요하고 의연한 '나'로 성숙하는 시간이다. 정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려면, 그 안에 부단한 움직임을 품고 있어야 한다. 정적은 정중동(靜中動)이다.

 

정중동의 사전적 의미는 조용한 가운데 어떠한 움직임이 있음을 말한다. 잠잠한 호수와도 같은 마음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치 자전거 바퀴를 굴리면 위태로워 보이는 그것이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그러나 가만히 자전거 위에 올라앉아있으면 기울어지는 것처럼. 그 안의 부단한 움직임, 그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소제목으로 이십여 개의 부단한 움직임을 풀어내고 있으리라. 그러나 프롤로그에서 그는 '경청'을 이야기한다. 아마도 이 책의 큰 흐름은 그것이지 않을까? 

 

 

 

 

정적의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움직임은 '경청'이다. 정적을 수행하는 사람은 자신을 유혹하는 외부의 소리를 거부하고,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소리를 듣는다. 자신의 사소한 생각에도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인다. 그는 듣기 위해 침묵을 유지한다. 

 

영어 단어 '히어링(hearing)'은 자기중심적이고, '리스닝(listening)'은 타인중심적이다. 히어링은 상대방의 말을 흘려듣는 낮은 수준의 듣기다. 자신에게 익숙한 말만 취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요구를 헤아릴 수 없다. 그들은 이 들음을 통해 자신의 아집을 강화할 뿐이다. 이보다 높은 차원은 상대방의 말을 배려하는 리스닝이다. 영어 동사인 리슨(listen)은 자신이 듣고자 하는 대상 앞에 'to'가 놓인다. 그러므로 '리스닝'은 상대방의 말에 나의 귀를 가져다 대는 노력이 필요한 행위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과 귀를 쭉 뻗어 내미는 수고다.

 

hearing과 listening의 비교는 참으로 적절했다.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말했다. "경청은 노력입니다. 그냥 듣는 것은 오리도 할 줄 압니다." 그래서 정중동이다. 그냥 가만히 있는다면 그건 히어링에 불과하다. 리스닝을 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이다. 주의 깊게 귀를 그쪽으로 향해 듣는 움직임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안다. 나의 입을 봉하고 귀를 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특히 나는 그렇다. 어찌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입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지인을 만나면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 안달이다. 내가 지껄이는 이야기가 그에게 얼마나 가 닿았을까? 내 말의 개수가 많을수록 그가 소화하는 개수는 더욱 적어질 텐데 나는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은 얼마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 지인 중의 몇 명이 정말 말이 많은데,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지끈거렸고, 또 누군가는 같은 말의 반복, 누구나 아는 말의 나열로 나를 미치게 만들기도 한다. 그들 모두 결코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부류인가? 역시 두통유발자이리라. 저자는 말한다. "듣기를 수련한 적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말을 하기에 급급하다." 내 얘기구나... 아직도 더 많이 도를 닦아야 하리라.

 

 

 

 

정적은 '또 다른 자신', '흠모하는 자신'이라는 타인의 섬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고요다.

 

저자가 말하는 또 다른 자신, 흠모하는 자신은 '심연의 나'를 말함이리라. 깊은 그곳의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것이다. 잘 들으려면 주변의 아우성을 물리치고, 흩어지는 산만함을 집중하고, 오롯이 나에게만 몰입해야 한다. 나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 알고 싶다. 내가 무얼 원하는지. 나의 꿈, 나의 목표... 나의 별...

 

 

 

이 책을 통해 나는 또 얼마나 성장할지 기대된다.

별 탈 없이 잘 가다가 있지도 않은 돌부리를 스스로 길 위에 박아두고 스스로 발이 걸리도록 한다. 어쩌면 있지도 않은 돌부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돌부리일 수도 있겠다. 내 발에 걸리는 돌부리는 타인에 의한, 외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나에 의한 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환갑이 되어가는 대한민국 아줌마 파워를 가진, 암경험자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쥔 이 여인에게 태클을 걸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가끔씩 나약해지는 스스로가 문제일 뿐. 그리고 그 돌부리의 원인은 정적을 통해, 고요함 속의 부단한 경청을 통해 알아내고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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