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격(間隔) : 사이의 침묵
간(間)의 의미가 '사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격(隔)에 '침묵'의 의미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격(隔)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사이', '차이', '멀어지다' 등의 의미가 있다. 저자는 그 사이의 차이 또는 멀어짐을 그저 거리상의 차이가 아닌 침묵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나는 무릎을 쳤다. 간격은 물리적인 거리의 차이뿐만이 아니라 침묵으로 느껴지는 감각의 차이다. 그리고 사람 사이엔 그것이 꼭 필요하다.
관계의 핵심은 '간격'이다. 간격이 존중될 때 관계가 온전해지고, 비로소 나는 독립적인 나로 존재한다. 나를 포함한 우주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그대로,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나와 너 그리고 불특정 다수인 3인칭과 구별을 가능하게 하는 사이, 즉 간격이다.
나와 너와의 관계에서 그 물리적이며 질적인 '사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 관계는 무너진다. 나와 너 혹은 그들과의 관계에서 이 둘을 구별하는 시공간을 인정하지 않으면 나를 포함한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나와 너 사이라는 차이는 우주 안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을 자연스럽고 독립적으로 만드는 필요조건이다. 이 구별이야말로 숭고하고 거룩하다.
저자의 고차원적 설명에 대비되어 나의 이야기는 몹시 저차원적일수 있겠다. 그러나 나의 경우를 돌아보면 누군가 나의 boundary 안으로 들어오면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는 나를 떠올린다. 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단순히 말뿐인 대화는 원치 않는다. 내 이야기가 상대에게 흡수되고, 상대의 이야기가 내게 흡수되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따뜻한 말을 전하는 그런 대화를 원한다. 그러나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늘 허전한 마음이 되곤 한다. 이런 지경인데,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몇 번의 만남과 몇 차례의 대화로 나를 꽤나 아는 듯이 내 영역을 넘어오면 그 사람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불필요한 아는 척에 화가 나곤 했다.
얼마 전에 관계가 깨진 한 지인이 있었는데, 나와 같은 암경험자이고, 얼마 남지않은 삶을 본인이 알고 있기에 나는 그녀와 꽤 자주 만남을 가졌다. 이 정도면 우리가 꽤 친하다고 생각했었던 건지 그녀는 선을 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그녀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손절'이라는 말을 좋아하지도 않고, 사람과의 인연을 제법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에게 그녀와의 끝냄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 주었는데, 이때, '간격'에 대한 나의 성찰이 있었다면 그녀와 적절히 간격을 유지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또 반대로 누군가는 심할 정도로 '손절'하는 사람이 있다. 그 대상이 되었다고 느꼈을때 내 마음은 상당히 복잡했다. 그녀는 '서서히'라는 단어를 모르는 듯했다. 그런 태도도 상대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는 듯했다. 자기의 처신이 깔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간격이라는 것도 적절해야하지 않을까? 침묵의 결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두 사람의 온도차가 때론 차갑기도, 때론 따뜻하기도 할 텐데, 나는 어떤 온도의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걸까? 누군가에게는 차갑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따뜻하기도 하겠지만, 그것이 늘 적절한 온도이기를 바라본다.
사랑은 상대방과의 간격을 존중하는 연습이다. 그 간격은 대상을 온전한 인간으로, 온전한 세계를 가진 가치로 인정하는 발판이기 때문이다.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내가 장악해야 할 순간에도 모두 간격이 있다.... 나는 동료와 부인 혹은 남편과 자식과 형제자매, 그리고 반려견과 자연과의 간격을 인식하고 존경하는가?
저자는 소중한 사람일수록, 모든 공간과 시간, 순간까지도 간격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이 있더랬다. 젊은 시절, 뜨거웠던 그때엔, 남편도, 아이도 모두 내 것이었다. 조금의 간격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만큼 아팠었다. 그때에 간격을 알았더라면...? 후회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절이 있을 테고, 나에게 존재하는 그 시절도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니. 이 나이 먹어서조차 간격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자식조차 더 멀어질 텐데, 이젠 내가 먼저 간격을 조정한다. 그들이 지긋지긋해하며 멀어질까 염려되어...
사이의 침묵!
정말 멋지다! 거리가 아니라 침묵이라니! 침묵이 필요한 시간인데, 나는 과연 침묵하고 있는가? 말 많은 나는 자주 부끄러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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